동남아시아 건축

라오스 국경 마을의 흙벽 건축과 강 주변 생존 방식

think-1999 2025. 5. 5. 17:34

동남아시아 건축은 자연과의 공존 속에서 그 지역의 생태, 사회 구조, 종교적 감각을 모두 담아내는 방식으로 발전해 왔다. 화려한 사원이나 장식적인 도시 건축만 아니라, 사람들의 일상적인 삶을 반영하는 소박한 전통 주택 역시 동남아 건축의 중요한 축을 이루고 있다. 특히 라오스 북부의 국경 지대, 태국 또는 베트남과 인접한 고립된 농촌 마을들은 오늘날까지도 흙, 짚, 나무 등 현지 자재를 활용한 건축양식을 고수하고 있으며, 그 안에는 강 주변 생존 방식과 자급자족적 삶의 철학이 담겨 있다.

이 글은 라오스 국경 지역의 흙벽 주택이 어떻게 환경에 적응하며 생존 기반을 형성했는지, 그리고 이 구조가 단순한 거주 공간을 넘어 물, 흙, 바람이라는 자연 요소와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 건축을 통해 읽어보는 것을 목표로 한다. 동남아시아의 전통 건축이 종교적 상징만이 아니라, 생존 전략의 총합이라는 시선을 통해 살펴보는 중요한 사례다.

흙벽 건축의 재료와 구조적 특징

라오스 국경 마을의 전통 주택은 주로 ‘라테라이트(laterite)’나 ‘점토질 황토’를 기반으로 한 흙벽으로 구성된다. 이 지역은 산지와 평야가 만나는 곳으로, 장마철에는 폭우가 쏟아지고 건기에는 건조한 바람이 불기 때문에, 주거 공간은 열 조절 능력과 습도 조절 능력을 동시에 요구받는다. 흙벽은 이러한 기후에 탁월하게 대응하는 재료로, 한낮의 열기를 흡수한 뒤 밤에 천천히 방출하여 실내를 쾌적하게 유지한다.

건축 방식은 흙을 나무틀에 채워 넣고, 말려 굳히는 래머드 어스(rammed earth) 기법이 흔히 쓰인다. 이때 외벽은 보통 두껍고 창은 작게 설계되어, 내부 온도 변화와 바람의 세기를 최소화한다. 지붕은 벼 이삭이나 바나나 잎을 엮어 만든 이엉지붕을 사용하거나, 요즘은 파도형 양철을 혼합해 구조적 안정성과 수명을 늘리기도 한다. 주택 바닥은 땅을 다져 만든 경우가 많지만, 홍수 가능성이 높은 지역은 나무 기둥으로 띄운 고상식 바닥 구조를 접목하기도 한다.

강 주변에 최적화된 주거 배치와 생존 전략

이 지역의 건축은 단순히 흙으로 벽을 쌓는 기술을 넘어서, 강이라는 생명선과의 관계에 기반하여 공간 배치와 방향이 정해진다. 라오스 북부는 메콩강과 그 지류를 끼고 마을이 형성되어 있고, 주택 대부분은 강과 평행하거나 경사진 언덕 위에 배치되어 홍수 시 침수를 피하도록 설계된다. 계절에 따라 수위가 크게 달라지기 때문에, 건물의 기단 높이, 수방 벽의 위치, 배수구의 방향까지도 강의 흐름을 고려하여 설계된다.

식수, 목욕, 빨래, 물고기 잡기 등 일상의 거의 모든 활동이 강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주택에서는 강변으로 쉽게 내려갈 수 있는 작은 통로 또는 경사 계단이 마련되어 있다. 이러한 접근 경로는 단순한 기능이 아니라, 자연을 향한 열린 관문으로서, 인간과 환경의 일상적 접촉을 매개하는 상징적 장치이기도 하다. 또, 강에서 채취한 자갈과 점토는 벽체 보강, 화덕 제작, 빗물 배수 구조에 재활용되며, 지역 생태 순환 시스템의 일부로서 건축이 작동한다.

 

라오스 국경 마을의 흙벽 건축과 강 주변 생존 방식

흙벽 주택과 공동체적 생활 구조

이 지역의 주택 구조는 단독 가구 단위이면서도, 마을 전체가 일종의 공동체적 연합체로 구성되어 있다. 개인 가구는 자율적으로 지어진 듯 보이지만, 그 배치에는 세대, 친족 관계, 생산 활동의 흐름이 반영되어 있어, 단순한 무질서가 아닌 공동체의 내부 질서가 담겨 있다. 주택들은 일렬 배치가 아니라, 중앙에 있는 공동 마당(타라나)을 중심으로 반원형 또는 불규칙 원형으로 배치되며, 이는 마을 주민 모두가 서로의 위치와 생활을 자연스럽게 인지하고 소통할 수 있도록 만든 구조다. 이 중심 마당은 단순한 공간이 아니라 사회적 관계의 무대이며, 사적인 공간과 공적인 삶을 연결하는 완충지대로 작용한다.

공동 마당에서는 계절별 농경 축제, 조상 제례, 마을 회의, 혼례나 장례와 같은 주요 의례가 열리며, 평상시에는 공용 조리, 수확물 건조, 장작 모으기, 아이들 놀이 공간, 노인의 휴식 공간 등 다기능적으로 활용된다. 이 마당은 특히 세대 간 소통과 협업의 장이 되기도 하는데, 예를 들어 수확기에는 여러 집이 공동으로 벼를 말리고, 저녁에는 각 가정의 불씨가 모여 공동 조리를 하기도 한다. 이는 주거 공간이 단절적이지 않고, 생활과 생산, 사회적 관계가 맞물린 순환적 구조로 설계되었음을 보여준다.

또한, 이 지역의 흙벽 주택은 대부분 반개방형 구조를 가지고 있다. 집의 한쪽 벽은 낮게 쌓거나 창문을 생략해, 이웃과의 시선과 공기의 흐름이 끊기지 않도록 설계되어 있다. 내부에는 큰 홀이 하나 있고, 가족 구성원은 칸막이나 천막을 이용해 동적인 생활 구역을 수시로 조정한다. 이는 고정된 공간보다는 유동적이고 유기적인 생활 구조를 선호하는 공동체적 감수성을 반영한다. 특히 이러한 구조 덕분에 서로의 삶이 ‘보이는’ 상태가 유지되며, 이는 자연스러운 상호 돌봄과 감시의 효과를 함께 낳는다.

흥미로운 점은 이러한 공동체 구조가 세대 간 공간 배분에도 반영된다는 것이다. 하나의 가정이라도 젊은 부부는 마당 근처에 작은 주거 공간을 새로 덧붙이고, 노인은 안쪽 깊숙한 공간에 거주한다. 이는 단순한 동거 개념이 아니라, **가족의 구조와 역할이 주거 공간 안에서 반영되고 있다는 점에서 ‘공간 안의 족보’**라 불릴 정도로 섬세한 구조다. 또한 여성은 취사 공간과 마당 경계에서 활동하며, 이는 집 안팎을 연결하는 중재자이자 일상 유지자의 역할을 강화한다. 즉, 주택의 공간 배치는 단지 기능적 배치가 아니라 가족 구조, 성 역할, 나이의 위계를 반영하는 사회적 건축이다.

이 모든 요소는 라오스 국경 마을의 흙벽 건축이 단순한 가옥이 아니라, 공동체의 질서를 집약한 사회 시스템이라는 점을 보여준다. 개별 주택은 자율적이지만, 그 구성 방식과 마을 전체의 배치는 상호 의존적이며, 이는 "한 집이 아니라, 한 마을이 곧 하나의 살아 있는 유기체"처럼 작동하는 것을 가능케 한다. 이러한 공동체적 건축 구조는 오늘날 도시화한 공간에서는 보기 어려운 집단생활의 직관성과 지속가능성을 시사한다.

현대화와 지속가능성을 고민하는 전환기

오늘날 라오스 국경 마을에도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다. 일부 가정은 콘크리트 벽과 금속 지붕을 선호하며, 더 넓은 공간과 보안성을 갖춘 현대식 주택으로 교체하고 있다. 그러나 많은 지역에서는 여전히 흙벽 건축이 생태적, 경제적, 사회적 측면에서 지속 가능한 대안으로 주목받고 있다. 재료 구입 비용이 거의 없고, 건축 방식이 간단하며, 공동체 구성원들이 함께 짓는 과정 자체가 사회적 결속을 강화하는 계기가 되기 때문이다.

최근에는 일부 NGO와 건축 교육 기관이 현대적 디자인과 전통 흙벽 기술을 결합한 ‘모던 어스 하우스’를 시범적으로 건축하며, 지역 주민과 함께 지속할 수 있는 거주 모델을 실험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흙이라는 재료의 열 성능, 습도 조절력, 자연 순환성과 같은 비자본 중심의 건축 가치가 재조명되고 있으며, 특히 기후 위기에 대응하는 자립형 건축 전략으로 다시 떠오르고 있다. 라오스 국경의 흙벽 주택은 지금도 여전히 생존을 위한 건축의 원형으로 우리에게 중요한 통찰을 제공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