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남아시아 건축은 단일한 양식이 아니라, 역사, 계층, 문화적 층위가 켜켜이 쌓인 복합체다. 이 가운데 베트남 하노이(Hà Nội)의 구도심(Old Quarter)은 그 다양성과 복잡성을 가장 생생히 보여주는 공간이다. 1,000년 넘는 시간 동안 하노이는 왕조의 수도이자, 상업의 중심지였으며, 전통과 현대가 교차하는 독특한 도시 풍경을 오늘날에도 간직하고 있다.
하노이 구시가에서는 유독 관청형 목조건물과 서민 주택이 극명한 대비를 이룬다. 공식 건물들은 목재 기둥과 중정(中庭)을 갖춘 정형적 배치를 따르며, 질서와 권위를 상징하는 구조를 보여준다. 반면, 골목골목을 채운 서민 주택들은 협소하고 비좁은 공간 속에서도 유연성과 생명력을 품은 건축적 실험장처럼 보인다. 하노이 구도심에서 만날 수 있는 관청형 목조건물과 서민 주택의 대비를 통해, 공간에 드러나는 사회구조와 삶의 전략을 살펴보자.
관청형 목조건물의 구조와 상징성
하노이 구도심의 관청형 건물은 대부분 왕조시대부터 이어져 온 중정형 목조건축을 기본으로 한다. 대표적인 예로, 옛 왕궁 부속 건물이나 지방 행정기관인 딘(Đình), 반(Văn Miếu – 문묘) 등을 들 수 있다. 이 건물들은 대체로 정면성이 강조된 구조를 가지며, 목조 기둥을 나열해 공간을 구획하고, 지붕은 기와로 덮여 중앙권위와 자연의 조화를 동시에 상징한다.
건물 배치는 대개 중앙에 주요 공간(예배당이나 회의실)이 위치하고, 양측에 부속건물이 대칭을 이루는 형태를 따른다. 중정은 빛과 바람을 들이는 기능뿐 아니라, 공간을 통한 위계적 질서의 표현이었다. 문지방, 처마, 지붕의 곡선, 벽의 장식은 모두 규칙과 예를 반영하여, 공적 질서와 유교적 세계관을 건축에 투영했다.
이러한 관청형 건물은 단순히 행정업무를 위한 장소가 아니라, 권력의 상징 공간이었다. 건축적 규모, 재료의 질, 조각의 섬세함 등 모든 요소는 사용자의 지위와 도시 내 위상을 반영했다. 벽화나 부조에는 국가 이념이나 왕조의 권위를 나타내는 상징물이 새겨졌으며, 건물 자체가 하나의 시각적 권위 선언이었다.
서민 주택의 좁고 깊은 구조, 생존의 전략
반면, 하노이 구시가의 서민 주택들은 전혀 다른 양식을 보여준다. 이들은 대개 폭이 매우 좁고 길게 뻗은 ‘튜브 하우스(Tube House)’ 구조를 가진다. 집 폭은24미터에 불과하지만 2040미터에 이르기도 한다. 이는 과거 도로 면한 폭에 따라 세금이 부과되던 제도에서 비롯된 결과였다.
서민들은 세금을 아끼기 위해 최소한의 폭만 길가에 노출시키고, 뒤로 길게 집을 확장하는 방식을 택했다. 이로 인해 하노이 구도심은 좁고 긴 집들이 빽빽이 이어진 독특한 풍경을 갖게 되었다. 하지만 이 구조는 비좁은 물리적 조건 속에서도 광장, 중정, 다락, 샛문 등을 만들어내어 놀라운 적응성과 창의성을 보여준다.
튜브 하우스 내부에는 작은 중정이나 천창을 설치해 환기와 채광을 확보하고, 세대별로 공간을 수직으로 분할해 가족 단위 생활을 가능하게 했다. 각 가구는 거실, 주방, 작업실, 숙소를 세로 방향으로 겹쳐서 사용했으며, 이 과정에서 수직적 도시생활 문화가 발달했다. 이러한 주택 구조는 비좁지만, 사회적 유대와 경제활동의 거점이 되기도 했다.
거리 풍경에 드러난 공간의 이중성
하노이 구도심에서는 거리 풍경 자체가 공적 질서와 사적 생존의 대비를 드러낸다. 넓은 대로와 광장은 관청형 건물과 연결되어, 권위와 질서를 상징한다. 반면, 좁고 구불구불한 골목길은 튜브 하우스가 빼곡히 들어선, 혼잡하고 역동적인 생존의 공간이다.
관청 건물 주변은 정돈되고 조용하며, 대칭성과 중정이 강조된다. 반면 서민 주택 지역은 가게, 노점, 오토바이 주차, 시장이 얽혀 혼돈 속의 질서를 만들어낸다. 튜브 하우스 1층은 종종 소매점, 음식점, 수공업 작업장으로 변모하며, 2층 이상은 주거지로 활용된다. 이 과정에서 주거와 상업, 공적과 사적, 질서와 자율이 한데 얽히는 도시문화가 탄생했다.
이러한 이중성은 하노이 사람들의 삶의 방식에도 반영되어 있다. 공공장소에서는 유교적 예의와 체면을 중시하지만, 골목길에서는 가족, 이웃과의 친밀한 관계를 통해 자율적 공동체를 형성한다. 건축은 이 삶의 이중성을 그대로 드러내는 무언의 사회적 언어라 할 수 있다.
현대화 속에서의 하노이 구도심의 변화와 과제
오늘날 하노이 구도심은 빠른 도시화와 관광산업의 발전 속에서 변화하고 있다. 관청형 건물들은 문화유산으로 복원되고, 일부는 박물관, 문화센터, 공공건물로 개보수되었다. 반면, 튜브 하우스 지역은 재개발과 고층화 압력에 직면하고 있다.
하지만 최근에는 튜브 하우스의 공간적 창의성과 공동체적 가치를 재조명하려는 움직임도 있다. 일부 현대 건축가들은 전통 튜브 하우스 구조를 현대 아파트나 복합 상업공간에 적용해, 좁은 공간 속에서 빛과 바람을 최적화하는 설계를 실험하고 있다. 또한 관청형 건물 복원에서도 단순한 외형 복구가 아니라, 중정과 개방성, 수평적 공간 흐름을 현대 도시 공간에 이식하려는 시도가 이루어지고 있다.
하노이 구도심은 단순한 과거의 잔재가 아니다. 그것은 공간을 통해 사회구조를 반영하고, 삶의 지혜를 축적해온 살아 있는 건축문화다. 관청형 건물과 튜브 하우스의 대비는 지금도 하노이 거리 곳곳에서, 질서와 자율, 권위와 생존이 엮이는 동남아 도시의 진짜 얼굴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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