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티모르는 동남아시아의 가장 젊은 독립 국가 중 하나로, 오랜 내전과 정치적 불안정 속에서도 도시화가 빠르게 진행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경제 기반이 약한 탓에, 수도 딜리(Dili)를 포함한 여러 도시 주변에는 공식적인 도시계획에서 배제된 빈민가가 형성되고 있습니다. 이곳의 주민들은 재정적 여건이 부족하기 때문에, 주거를 위한 건축 자재를 구매하기가 어려워집니다. 그 결과 폐목재, 깡통, 타르포린, 차량 폐부품 등 주변에서 구할 수 있는 재활용 자재를 활용하여 스스로 집을 짓고, 보수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폐자재 건축은 단순히 궁핍한 삶의 결과물이 아니라, 주어진 조건 속에서 살아남기 위한 창의적 대응의 산물입니다. 주민들은 건축에 대한 전문 지식이 없지만, 다양한 폐자재의 특성을 스스로 실험하며 구조적으로 안전하고, 기후에 어느 정도 대응할 수 있는 집을 만들어갑니다. 예를 들어, 고무 타이어를 벽면에 붙여 단열 효과를 높이거나, 자동차 유리창을 활용해 채광을 확보하는 식의 실용적 시도가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는 가난을 기반으로 한 독창적 건축 문화의 한 형태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집 짓기의 공동체적 의미
동티모르 도시 빈민가에서의 폐자재 건축은 개인의 기술을 넘어선 공동체적 협업을 통해 완성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집을 짓는 일은 종종 가족이나 이웃들이 함께 모여 며칠에 걸쳐 진행되며, 공구와 자재는 서로 돌려 쓰거나, 특정 자원이 부족할 경우 공동으로 수집합니다. 한 사람의 집이 완성되면, 다음 사람의 집을 짓기 위한 작업이 이어지는 식으로 순환형 상호 협력 구조가 자리 잡고 있습니다. 이러한 구조는 단순히 노동력을 나누는 것을 넘어, 사회적 연대와 생존 전략의 통합이라는 측면에서도 의미를 가집니다. 주민들은 어떤 자재가 어디에 가장 적합한지를 공동으로 논의하며, 재난이나 손상에 대한 복구 방식을 공유하고, 어린 세대에게도 이러한 생존 기술을 자연스럽게 전수합니다. 또한 공동 우물이나 공용 화장실처럼 공유 공간도 자발적으로 조직되어 유지되며, 이것이 가능하게 하는 중심에는 건축을 통해 형성된 신뢰와 협력이 있습니다.
기후 대응과 실용적 설계
동티모르는 열대 몬순 기후에 속하여, 우기에는 갑작스러운 폭우가 자주 발생합니다. 정식 인허가 없이 지어진 집들은 폭우와 침수에 매우 취약할 수밖에 없지만, 주민들은 매년 반복되는 기후에 나름의 대응 전략을 축적해 왔습니다. 집을 약간의 기초 높이에 올려 침수 피해를 줄이는 방법, 경사지붕을 설치해 물이 빠르게 빠지도록 하는 방식, 빗물을 모아 저장하는 간이 탱크 설치 등은 모두 주민들이 직접 개발하고 개선해 온 결과물입니다. 또한 일부 가구는 나무받침 위에 지붕만 얹은 ‘반개방형 구조’로 주거를 구성하여, 내부가 덥고 습하지 않도록 합니다. 이런 구조는 한낮의 강렬한 햇볕을 피하고, 밤에는 바람이 통하게 하여 에어컨 없이도 견딜 수 있는 기후 순응형 디자인의 일종으로 평가됩니다. 전문 건축가가 설계한 것이 아니지만, 환경에 맞춘 자생적 설계라는 점에서 지역 기반 생태 건축의 원형이라 할 수 있습니다.
교육과 건강, 공간의 다기능성
동티모르 도시 빈민가의 주거 공간은 단지 잠을 자는 곳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한 채의 집이 곧 가족 전체의 삶을 담는 그릇이 되기 때문에, 비록 면적은 작고 자재는 임시적일지라도 그 내부는 매우 복합적인 기능을 수행하도록 설계되어 있습니다. 요리, 학습, 휴식, 물품 보관, 심지어 작은 상업 활동까지도 이 한정된 공간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예를 들어, 낮에는 어머니가 바닥에 앉아 식사를 준비하는 부엌 공간이 밤이 되면 아이들의 침실로 변하고, 아침이면 가족 전체가 식탁으로 사용하는 나무판 위에서 아이들이 숙제하거나 책을 읽는 공간으로 전환됩니다. 실제로 일부 가정은 공간 구획을 위해 천이나 커튼을 활용하여 낮과 밤, 활동과 휴식의 영역을 시각적으로 나누고 있으며, 공간의 기능을 시간에 따라 유동적으로 변화시키는 방식으로 실용성을 확보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작지만 다기능적인 공간’은 주거의 본질을 넘어, 생존을 위한 창조적 건축 활용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아이들이 학업을 지속할 수 있도록 자연광이 잘 드는 방향으로 창을 내고, 책걸상을 벽에 접이식으로 부착해 평소에는 접어두었다가 필요할 때 펼쳐 쓰는 방식도 흔히 사용되고 있습니다. 어떤 가정은 바닥에 색을 칠하거나, 벽면에 자녀의 글씨 연습 흔적을 그대로 남겨 공간을 생활 교육의 일부로 통합하고 있습니다. 이는 단순한 ‘주거 공간’이 아닌, 비형식적 교육의 무대로서의 주거 활용이라 할 수 있습니다. 건강 측면에서도 폐자재 주택은 다양한 도전에 직면하지만, 주민들은 이에 나름의 방식으로 대응하고 있습니다. 특히 위생 문제는 가장 큰 고민 중 하나로, 많은 가정이 비위생적인 하수 환경이나 모기 등 질병 매개체로부터 가족을 보호하기 위한 다양한 방법을 모색하고 있습니다. 일부 주민은 바닥을 콘크리트로 덧대어 습기와 벌레 유입을 줄이고, 방충망을 창문과 입구에 직접 설치하여 말라리아나 뎅기열과 같은 질병을 예방하고자 합니다. 또한, 통풍이 잘 되지 않는 구조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벽면 상부에 구멍을 내거나, 천장을 높여 더운 공기가 머물지 않도록 유도하며, 실내 온도와 습도를 조절하는 방식도 많이 활용됩니다. 일부 집은 뚜껑이 열리는 구조의 작은 창을 지붕 가까이에 만들어, 빛과 바람이 동시에 들어오게 하여 환기와 채광을 동시에 확보하고 있습니다. 더 나아가, 가정마다 자구적인 의료 공간을 마련하려는 시도도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응급 약품이나 체온계, 상처 소독 도구 등을 벽에 선반으로 정리해 두고, 가족 중 누군가 아플 때를 대비해 비상 공간을 따로 지정해 놓기도 합니다. 이러한 장치는 국가의 공공 보건 시스템이 취약한 상황 속에서, 생활 자체가 하나의 보건 전략이 되는 사례로 볼 수 있습니다. 결과적으로, 동티모르 빈민가의 주거는 단순한 피난처나 잠자리 이상의 기능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그 속에는 자녀를 교육하고, 가족을 건강하게 지키며, 일상에서 생계를 이어가려는 주민들의 끊임없는 창의성과 실천력이 녹아 있습니다. 이러한 공간은 ‘가난’이라는 단어만으로는 절대 설명할 수 없는, 복합적이고 역동적인 생존의 현장이라 할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이러한 다기능적 공간 구성이야말로, 도시 빈민이 당면한 구조적 한계를 극복하고자 하는 건축적 대응이자 생활 전략으로서 더욱 주목받아야 합니다.
도시 개발과 비공식 건축의 가치
최근 동티모르 정부는 딜리를 중심으로 도시 개발과 재정비 계획을 추진하고 있지만, 공식적 토지 소유권이 없는 빈민가 주민들은 종종 철거 대상으로 분류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비공식 주거지에는 수십 년 동안 축적된 생존의 지혜와 협동의 네트워크가 존재합니다. 오히려 정부가 이를 완전히 없애려 하기보다는, 자생적 건축을 존중하며 보완하는 방식의 도시 전략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현지 시민단체를 중심으로 제기되고 있습니다. 동티모르의 폐자재 건축은 단지 가난의 상징이 아니라, 극한의 조건 속에서도 인간다운 삶을 유지하려는 건축적 응답입니다. 주어진 자원 안에서 가족을 보호하고, 공동체를 유지하며, 자연에 적응하는 이 구조들은 동남아시아의 다른 국가들이 직면한 도시 빈민 문제에 대한 중요한 시사점을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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