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남아시아 건축

인도네시아 토라자족의 통코난 가옥과 조상 숭배 공간 구조

think-1999 2025. 4. 26. 12:13

동남아시아 건축은 단순히 기후에 대응한 구조가 아니라, 종교, 조상숭배, 공동체 삶이 얽힌 ‘삶의 철학’ 그 자체다. 그중에서도 인도네시아 술라웨시(Sulawesi)섬의 고산지대에 터를 잡고 살아가는 토라자(Toraja)족의 전통 가옥인 통코난(Tongkonan)은 건축과 신념이 완전히 융합된 독보적인 사례다. 이들의 집은 단순한 주거 공간이 아니라, 조상과 대화하고 공동체 정체성을 확인하며 죽음 이후 세계와 연결되는 제의적 장소이기도 하다.

토라자족의 사회는 오늘날에도 조상 숭배와 장례 의례 중심의 사회 구조를 유지하고 있다. 그 삶의 철학이 가장 응축되어 있는 장소가 바로 통코난이다. 이 건물은 지붕에서 기둥, 실내 배치까지 모든 요소가 철저히 조상과의 관계, 가족의 위계, 신화적 세계관에 따라 구성된다. 동남아 건축 전반에서 보기 드문 이 구조는 단지 문화적 특이성이 아니라, 건축이 어떻게 하나의 정신적 언어가 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생생한 예라 할 수 있다.

물소 뿔이 수직으로 쌓이는 전통 가옥, 통코난

토라자족의 통코난은 겉모습부터 눈길을 사로잡는다. 양쪽으로 부풀어 오른 배처럼 곡선을 그리는 지붕이 인상적인 이 건축은, 하늘을 향해 열린 공간이자 신화적 출발점인 ‘남쪽 하늘’을 상징한다. 통코난이라는 이름 자체가 ‘앉는다’, 즉 조상의 자리에 ‘머문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그만큼 이 집은 거주 공간인 동시에, 조상과 함께 사는 공간이다.

지붕은 대나무를 켜켜이 얹어 만든 전통 방식으로, 지역의 강한 비를 막고 통풍을 돕는다. 벽은 목재 판자로 구성되며, 그 위에는 빨강, 검정, 황금, 흰색으로 구성된 전통 문양이 채색되어 있다. 이 색들은 각각 피와 힘, 죽음, 신성, 순수를 상징하며, 단순한 장식이 아니라 건물 자체가 하나의 신화적 이야기로 기능한다.

특히 통코난 앞에는 수직으로 쌓인 물소 뿔 장식이 필수적이다. 이 뿔은 가족이 거행한 장례식에서 잡은 물소의 수를 상징하며, 많을수록 가문의 명예가 높다는 뜻이다. 이 장식은 곧 사회적 위계, 경제력, 조상에 대한 예우의 강도를 시각화하는 상징이며, 전통 사회에서 이 가옥의 위상을 결정짓는 요소 중 하나다.

통코난의 구조는 남쪽을 향한 입구, 북쪽으로 향하는 조상 좌석, 중심 마루, 부엌과 가족 공간 등으로 구성되며, 가옥 자체가 하나의 우주적 질서로 설계되어 있다. 이러한 구조는 거주자의 신분과 역할, 조상과의 위치 관계를 반영하며, 공간을 통해 사회의 철학을 보여주는 동남아 건축의 정수라 할 수 있다.

죽음을 품은 공간, 장례와 가옥의 통합

토라자족 사회에서 통코난은 단순한 집이 아니라, 조상을 위한 살아 있는 제단이자 장례 의식의 중심 무대다. 장례는 이 지역에서 중요한 의례 중 하나이며, 통코난에서 시작해 가족 묘지까지 이어지는 일련의 과정은 수주에서 수개월에 이르기도 한다. 이 기간에 집은 조상의 혼을 모시는 신성한 공간이 되고, 모든 친족과 마을 사람들이 이 집을 중심으로 모인다.

장례 과정에서 정면 마당에는 물소와 돼지가 희생되고, 그 피는 조상의 안식을 위한 제물로 바쳐진다. 이후 뿔은 가옥 앞 기둥에 걸린다. 가옥 내부는 일시적으로 제례 공간으로 변모하며, 조상의 영혼이 머무는 곳으로 여겨진다. 이는 동남아에서 보기 드문, 살아 있는 주택과 죽은 자의 공간이 완전히 겹치는 사례다.

또한 토라자족은 죽은 자를 바로 땅에 묻지 않는다. 바위 절벽이나 자연 동굴 속에 장례용 관을 안치하거나, 석벽을 깎아 무덤을 만든다. 이는 죽은 자가 영원히 ‘하늘과 가까운 곳’에 머물기를 바라는 정신에서 기인하며, 무덤은 통코난의 방향성과도 일치되도록 배치된다. 이 모든 과정은 결국 가옥이 단지 기능적 구조가 아니라, 영적인 흐름과 시간의 축을 잇는 장치임을 보여준다.

 

인도네시아 토라자족의 통코난 가옥과 조상 숭배 공간 구조

 

장식 문양과 조형미 속 조상의 언어

통코난의 외벽과 기둥에는 토라자족 고유의 문양(Tau-tau)이 새겨진다. 이 문양은 단순한 추상무늬가 아니라, 가족의 조상, 삶과 죽음, 풍요와 재생을 상징하는 도형들로 구성되어 있다. 특히 반복적인 나선, 태양형, 동물 형상들은 단지 장식이 아닌, 전통 지식과 기억의 암호다.

건물 외벽에는 조상들의 이름과 기념일, 가문 상징이 기록되기도 하며, 이는 건물이 곧 가족의 연대기로 기능하게 만든다. 기둥 하나하나에도 정해진 상징이 새겨지고, 그 패턴은 가문의 혈통, 명예, 고유한 영적 존재를 표현한다. 즉, 통코난은 문자 없는 사회에서 건축 자체가 하나의 구전 문화의 매개체로 작용하는 것이다.

또한 일부 통코난에서는 작은 인형 형태의 조상상(Tau-tau)이 벽면에 붙거나 지붕 아래에 걸려 있는데, 이는 조상 영혼이 집을 보호하고 후손을 지켜본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이 조형물은 단지 의례용 소품이 아니라, 집과 조상의 연결고리이자 생과 사가 공존하는 증거물이라 할 수 있다.

현대 사회에서의 보존과 문화적 재활용

오늘날 인도네시아 정부와 여러 문화기관은 통코난의 가치를 재조명하고 있으며, 전통 건축 보존과 관광 산업의 접점을 확대하는 작업을 진행 중이다. 실제로 토라자 지역에서는 일부 전통 통코난을 박물관, 전통 숙소, 문화 전시 공간으로 재구성하여, 그 의미와 구조를 더 많은 사람에게 알리는 데 활용하고 있다.

관광객에게는 이 가옥이 이국적인 전통 건축처럼 보일 수 있지만, 지역 주민에게 통코난은 여전히 살아 있는 조상의 집이며, 장례와 제사, 공동체 조직의 중심축이다. 젊은 토라자족 건축가들은 이 전통 양식을 현대 주택이나 공공시설 설계에 적용하려는 움직임도 보인다. 예를 들어, 통코난의 곡선형 지붕을 유지하면서 내부는 콘크리트와 유리로 설계된 현대식 회관, 커뮤니티 센터 등이 등장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점은, 이러한 재해석과 계승이 단순한 관광 상품화를 넘어서, 지역 정체성과 공동체 중심 가치를 담은 건축적 정신의 계승으로 이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통코난은 과거의 유산이 아니라, 지금도 살아 있는 정신적 건축이며, 미래에도 인간과 공간, 시간과 믿음이 어떻게 이어질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상징적 구조로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