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남아시아 건축

말레이시아 말라카 전통가옥의 유럽 혼합양식과 베란다 건축

think-1999 2025. 4. 26. 16:36

동남아시아 건축은 다양한 문화의 만남과 충돌, 그리고 융합의 과정을 통해 독특한 형태로 발전해 왔다. 특히 말레이시아 서부 해안에 위치한 말라카(Melaka)는 동서양 문명이 가장 극적으로 만난 장소다. 15세기 말라카 왕국을 시작으로, 포르투갈, 네덜란드, 영국 식민 지배를 거치면서 다양한 문화가 섞였고, 이는 도시 건축 양식에도 깊은 흔적을 남겼다. 말라카 전통가옥은 말레이 전통 건축을 근간으로 하면서 유럽식 요소를 절묘하게 혼합한 형태로 발전했으며, 특히 베란다 구조를 통해 기후와 문화, 생활방식까지 아우르는 독특한 공간을 만들어냈다.

말라카는 단순한 교역 도시가 아니라, 문화적 실험실이기도 했다. 이곳에서 발전한 전통가옥은 ‘스트레이츠-중국인(Straits Chinese)’, ‘바바-논야(Baba-Nyonya)’ 문화와 연결되며, 말레이, 중국, 유럽 건축미학이 혼합된 독특한 스타일을 탄생시켰다. 여기에서는 말라카 전통가옥이 어떻게 유럽식 건축 요소를 받아들이면서도 동남아 기후와 사회적 생활양식에 맞게 변형되었는지, 그리고 베란다가 어떻게 도시 생활의 핵심 공간이 되었는지를 살펴본다.

 

말레이시아 말라카 전통가옥의 유럽 혼합양식과 베란다 건축

말레이 전통가옥과 유럽 혼합양식의 탄생

말라카 전통가옥은 기본적으로 말레이 전통 가옥(Kampung House)을 기반으로 한다. 이는 목조 구조, 고상 가옥 형태, 가파른 경사 지붕, 자연 환기와 통풍을 고려한 설계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러나 16세기부터 시작된 유럽 세력의 영향으로, 말라카 전통가옥은 점차 서양의 석조 기술, 아치형 출입구, 장식적 기둥, 스터코(stucco) 벽면 등의 요소를 받아들였다.

포르투갈은 말라카에 첫 번째 석조 요새를 건설했고, 이후 네덜란드 지배기에는 붉은 벽돌과 석회벽, 대형 창문이 특징인 네덜란드풍 건축이 확산하였다. 특히 ‘네덜란드 거리(Dutch Square)’를 중심으로 한 지역은 유럽풍 도시계획과 건축 스타일을 고스란히 반영했다. 그러나 말라카 주민들은 이러한 외래 양식을 그대로 모방한 것이 아니라, 열대 기후에 맞게 구조를 변형하고 현지 재료를 활용해 재해석했다.

전통 목조 구조 대신 석재를 사용하되, 기단부를 높이고 환기창을 추가하는 방식으로 습기와 침수 문제를 해결했다. 아치형 창과 기둥은 유지하되, 폭우를 막기 위해 깊은 처마와 내외부 베란다를 추가했다. 즉, 말라카 가옥은 유럽의 미학과 동남아의 실용성을 융합한 지역적 특색을 형성한 것이다.

베란다의 기능과 사회적 공간

말라카 전통가옥의 독특한 요소 중 하나가 바로 ‘베란다(Veranda)’ 구조다. 이는 단순한 외부 장식이 아니라, 가족생활, 사회적 교류, 상업 활동의 중심 공간이었다. 베란다는 집의 정면을 따라 설치된 긴 회랑 형태로, 지붕 아래 바람이 통하게 설계되어 뜨거운 햇빛과 비를 막아주는 역할을 했다.

낮에는 가족들이 베란다에 모여 일상을 보내고, 손님을 맞이했으며, 때로는 작은 상업 활동이 이루어지기도 했다. 저녁이 되면 베란다는 이웃들과 소식을 나누는 사회적 광장으로 변모했다. 말라카의 베란다는 단지 외부에 부착된 공간이 아니라, 실내와 실외를 연결하는 중간 지대이자, 사적 공간과 공적 공간을 부드럽게 이어주는 문화적 완충지대였다.

베란다 바닥은 대개 타일로 마감되었으며, 복잡하고 다채로운 패턴은 중국 도자기 문양과 유럽식 모자이크 디자인의 영향을 함께 반영했다. 벽면에는 스터코 기법을 활용해 식물이나 신화적 동물무늬를 새겼으며, 기둥과 아치 장식에도 말레이 전통 무늬와 유럽식 로코코 스타일이 절묘하게 혼합되어 있다. 이는 말라카 가옥이 단순한 거주 공간을 넘어 미학적 실험의 장이 되었음을 보여준다.

건축 재료와 색채의 혼합 전략

말라카 전통가옥의 재료 선택과 색채 사용은 기후 적응성과 문화적 상징성을 모두 고려한 결과다. 초창기 가옥은 열대 우림 목재와 석회, 조개껍질 혼합물로 마감되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붉은 벽돌, 테라코타 타일, 대나무 발코니가 혼합되었다. 이러한 재료는 열대성 폭우에 강하고 통기성이 우수하여, 말라카의 무더운 기후에 적합했다.

특히 주목할 것은 외벽 색채의 다양성이다. 초기에는 네덜란드풍 붉은색과 흰색이 주류였으나, 점차 중국풍 파스텔톤(연분홍, 연노랑, 연두)과 말레이 전통의 금색, 녹색 장식이 조화롭게 추가되었다. 이는 식민시대의 영향과 현지 문화의 융합을 색채로 시각화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지붕은 주로 홍색 테라코타 기와로 덮였고, 이는 강렬한 햇빛을 반사하고 비를 효과적으로 흘려보내는 기능을 했다. 베란다 기둥은 심플한 도리스식부터 화려한 로마네스크 스타일까지 다양한 양식이 혼합되어, 가옥마다 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이처럼 말라카 가옥은 재료와 색채를 통한 문화 혼합의 교과서라 할 만하다.

현대 도시 재생 속 전통가옥의 가치

오늘날 말라카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으며, 전통가옥 보존과 도시 재생이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다. 구시가지 일대의 전통 가옥들은 카페, 갤러리, 게스트하우스, 문화센터 등으로 개보수되어, 역사성과 현대적 생활방식이 공존하는 공간으로 재탄생하고 있다.

특히 일부 건축가들은 베란다 구조를 현대 아파트와 상업시설에도 도입해, 통풍, 자연 채광, 커뮤니티 형성이라는 전통적 기능을 현대 도시 설계에 적극 활용하고 있다. 전통 양식 베란다를 갖춘 게스트하우스, 모자이크 타일 복원 프로젝트, 스트레이츠 차이나 하우스의 현대적 개보수는 모두 과거와 현재를 잇는 건축적 실험이라 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복원이 단순히 외형 복구에 그치지 않고, 당시 사람들이 살던 생활방식과 문화를 함께 복원하려는 노력이라는 점이다. 과거의 말라카 가옥은 이제 단순히 유물이 아니라, 현재와 소통하는 살아 있는 도시 문화의 일부로 자리 잡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