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남아시아 건축

인도네시아 바뉴왕이의 대나무 가옥과 공동 주거

think-1999 2025. 5. 1. 06:07

동남아시아 건축에서 대나무는 단순한 재료를 넘어 하나의 문화적 상징이다. 인도네시아 자바섬 동쪽 끝에 위치한 바뉴왕이(Banyuwangi) 지역은 독특한 대나무 건축 전통과 공동체 중심의 주거문화를 동시에 유지하고 있는 곳이다. 해안과 산지가 만나는 이 지역은 열대기후 특성상 고온다습하며, 자연재해에 노출되기 쉬운 환경이다. 그 속에서 바뉴왕이 주민들은 가볍고 유연하며 재생할 수 있는 대나무를 활용해, 세대를 잇는 주거 시스템을 발전시켜 왔다.

이 지역의 가옥은 한 가족이 아닌 여러 세대가 함께 거주하는 구조로, 대나무를 기본 재료로 한 채 구조가 서로 이어지는 독특한 공동 주거 형태를 가진다. 이는 단순히 공간을 나누는 방식이 아니라, 가족 간 협력과 공동체 의식이 깊이 뿌리내린 주거 철학이다. 이 글에서는 바뉴왕이 전통가옥의 대나무 구조와 공동 주거 시스템이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를 살펴본다.

대나무 건축의 구조와 특징

바뉴왕이의 가옥은 전통적으로 ‘룸박(Lumbung)’이라 불리는 구조에서 유래한다. 이는 곡식 저장소 형태의 단층 또는 복층 고상가옥으로, 대나무를 엮어 만든 기둥, 바닥, 벽으로 구성된다. 대나무는 현지에서 손쉽게 구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자연 환기, 열 차단, 구조적 유연성을 갖춘 이상적인 건축 자재다.

기둥은 일정한 간격으로 배치되어, 가옥 전체를 공중에 띄운 형태를 이루며, 바닥은 대나무를 평행하게 배열해 통기성과 탄력을 확보한다. 지붕은 잎사귀나 얇은 대나무 판을 겹겹이 얹어 제작되며, 우기에 물을 잘 흘려보내도록 경사가 크게 설계되어 있다.

이 구조는 태풍이나 지진이 발생했을 때 충격을 흡수할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으며, 내부는 칸막이 없이 개방형 다목적 공간으로 유지되어 가족 구성원 간 유연한 생활이 가능하다. 가벼운 자재 덕분에 이동이나 재건축이 쉬워, 농번기와 비농기 주거지를 바꾸는 이동형 생활방식에도 적합했다.

집이 이어지는 공동 주거 시스템

바뉴왕이의 대나무 가옥은 단독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대부분 ‘줄지어 연결된 가족 가옥’의 형태로 확장되며, 한 채가 다른 채로 자연스럽게 이어진 구조를 갖는다. 할머니, 부모, 자녀가 각자 독립된 채를 사용하되, 복도나 데크를 통해 연결되어 하나의 주거 단지를 이룬다.

이러한 구조는 가족 간의 적절한 거리와 연결감을 모두 만족시키는 방식이다. 가족의 사생활은 보장되지만, 식사, 제사, 공동작업 등은 중심 공간에서 함께 이뤄진다. 특히 바깥마당은 물자 교환, 아이들 놀이, 공동 취사 등이 이루어지는 생활의 중심광장 역할을 한다.

재미있는 점은 이러한 연결 방식이 고정된 설계도가 아닌 유기적인 확장으로 이루어진다는 점이다. 가족이 늘어나면 새 채를 옆에 덧붙이고, 복도를 연결하는 방식으로 집이 성장한다. 이는 서양식 주택의 폐쇄성과 달리, 주거를 ‘살아 있는 구조’로 인식하는 바뉴왕이의 철학을 반영한다.

공동체와 신앙의 결합

이 지역의 가옥은 물리적인 연결 외에도 신앙적 공간 배치를 중심에 둔다. 각 주거 단지에는 대개 작은 제단이나 조상 기념 공간이 마련되어 있으며, 가족이 함께 조상에게 제사 지내거나 명절을 기념하는 장소로 사용된다. 이러한 공간은 단순히 집 한쪽에 마련된 구조물이 아니라, 별도의 대나무 정자 형태로 만들어져 가족의 정신적 중심으로 기능한다. 특히 결혼, 출산, 장례 등 생애 주기별 중요한 의식은 이 정자 주변에서 열리며, 이는 집과 신성의 연결점을 명확히 보여주는 구조다.

마을의 전통 신앙에서는 가족의 운명과 평안이 조상의 가호에 달려 있다고 믿는다. 따라서 가정의 제단은 가옥 중심에서 해를 바라보는 방향, 혹은 산·강 등 자연과 통하는 방향으로 배치되며, 그 위치는 반드시 촌로(村老)나 의례 전문가의 조언을 받아 결정한다. 이처럼 풍수 개념과 민간 신앙은 건축 전체를 하나의 신성한 틀로 엮는 역할을 하며, 주택의 출입 방향, 제단의 높낮이, 공동식사 공간의 위치까지 모두 의례적 질서에 따라 구성된다.

재료에 대한 인식도 신앙적이다. 대나무는 바뉴왕이 지역 주민들에게 ‘속이 비어 있으되 튼튼한 존재’로, 겸손함과 유연함, 공동체 정신을 상징하는 재료로 여겨진다. 대나무로 지은 집은 욕심 없는 마음의 상징이며, 바람이 불어도 부러지지 않고 흔들리는 구조는 삶의 적응력과 공동체의 지혜를 비유한다. 그래서 바뉴왕이 사람들은 단단한 콘크리트보다도 유연하지만 끈기 있는 대나무에 더 큰 정신적 의미를 부여해 왔다.

집을 새로 짓거나 해체할 때는 단지 가족의 일이 아니라 마을 전체의 일로 여겨진다. 이러한 건축 행위는 반드시 ‘지붕 올림 의례’(angkat atap)를 통해 시작되며, 제물과 향, 전통 음악이 어우러진 간단한 제례가 함께 치러진다. 심지어 낡은 가옥을 해체할 때에도 그 안에 깃든 조상의 기운과 기억을 정중히 보내는 의식이 선행된다. 마을 사람들은 이러한 과정을 통해 공간에 ‘생명’을 불어넣는다고 믿으며, 집은 단지 물리적 쉼터가 아니라 조상·이웃·자연과의 연계를 상징하는 생명체로 간주된다.

이처럼 바뉴왕이의 주거는 눈에 보이지 않는 정신의 흐름까지 담아내는 공간이다. 전통 가옥의 재료, 구조, 배치 방식은 모두 신앙, 윤리, 공동체의 가치를 품고 있으며, 이는 동남아 전통건축이 단순한 생활 기반을 넘어 삶의 철학과 조화를 상징하는 예술적 산물임을 보여준다.

 

인도네시아 바뉴왕이의 대나무 가옥과 공동 주거

 

현대화와 대나무 건축의 재해석

바뉴왕이에도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다. 일부 지역에서는 콘크리트 구조물과 금속 지붕이 빠르게 확산되고 있으며, 대나무 가옥의 전통이 위협받고 있다. 그러나 동시에 전통 대나무 건축의 가치에 주목한 복원과 현대화 프로젝트도 활발하게 진행 중이다.

건축가들과 사회적 기업들은 바뉴왕이 대나무 건축 기술을 활용해 에코 리조트, 교육 공간, 커뮤니티 센터 등을 설계하고 있다. 이들은 전통 구조의 유연성과 기후 적응력을 현대적인 디자인과 결합해, 바뉴왕이 고유의 건축미를 보존하고 있다.

특히 대나무의 재활용성, 탄소 흡수 능력, 저비용 구조라는 장점은 지속가능한 건축 모델로서 전 세계적으로 주목받고 있다. 바뉴왕이의 공동주거 시스템도 커뮤니티 중심 주거 개발 모델로 연구되고 있으며, 이는 단지 과거의 유산이 아니라, 미래 주거의 영감으로 재조명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