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남아시아 건축

브루나이 수상 마을의 전통 주택과 생태 적응의 지혜

think-1999 2025. 5. 11. 02:03

동남아시아 건축은 땅 위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필리핀 등 다양한 국가에서는 수로와 강, 바다 위에 세워진 수상 마을이 오랫동안 유지되어 왔고, 그중에서도 브루나이의 캄퐁 아이에르(Kampong Ayer)는 규모와 유지력 면에서 동남아시아에서 가장 독보적인 수상 공동체라 할 수 있다. 이곳은 브루나이 수도 반다르스리브가완 중심부에 위치하면서도, 지금까지 수 세기 넘게 물 위의 생활을 유지해 온 전통 마을로 알려져 있다.

이 글에서는 브루나이 수상 마을의 전통 주택 구조가 어떻게 생태 환경에 적응하며 발전해 왔는지, 그리고 주거 형태가 어떻게 공동체 정체성, 일상생활, 도시계획과 연결되어 있는지를 살펴본다. 단순한 물 위의 집이 아닌, 하나의 살아 있는 생태-건축-문화 시스템으로서 수상 마을을 재조명해 보려 한다.

브루나이 수상 마을의 전통 주택과 생태 적응의 지혜

수상 주택의 구조와 자연환경 대응 설계

캄퐁 아이에르의 전통 주택은 수면 위에 나무 말뚝을 박아 세운 고상식 구조로, 대부분 목재와 판자, 일부 주석 지붕 재료로 지어져 있다. 집은 조수에 따른 수위 변동, 강한 바람, 습도, 열기 등 다양한 자연조건에 대응해야해서, 말뚝은 평균 2~3미터 높이로 설치되고, 건물 간 거리를 일정하게 유지하여 수로 흐름을 방해하지 않도록 설계된다.

주택은 하나의 독립적 공간으로 지어지지만, 거의 모든 집이 통로 역할을 하는 나무 데크나 좁은 부교(floating walkway)로 서로 연결되어 있다. 이는 주민들이 배 없이도 마을 내부를 도보로 이동할 수 있게 해주며, 동시에 홍수나 침수 시 물 흐름을 자연스럽게 유도하는 구조로 기능한다. 지붕은 대체로 비스듬한 단면으로 빗물 배출에 유리하게 설계되고, 지붕을 통해 들어오는 바람의 순환 구조 또한 생활 온도 조절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공동체 기반의 생활 구조와 공간 활용

캄퐁 아이에르의 수상 주택은 단지 독립된 주거 공간이 아니라, 하나의 집이 교실, 사원, 가게, 모임 장소, 식당 등의 기능을 함께 수행하는 다목적 공간이다. 대부분의 가정은 부엌과 손님방 외에도, 가족 구성원에 따라 소규모 작업장이나 공동 식사 공간을 갖추고 있으며, 이는 수익과 생활을 동시에 해결하는 구조다. 흥미로운 점은 이 지역에 수상 학교, 수상 소방서, 수상 병원, 수상 모스크가 있다는 것이다. 이로써 주민들은 물 위에서도 육지와 다름없는 일상을 유지할 수 있게 된다.

공간 배치 역시 독특하다. 예를 들어, 일부 집은 어업에 종사하는 경우 지붕 위에 그물 보관대나 작업 데크를 만들고, 교사 가정은 학생들을 위한 작은 교실 공간을 마련해 둔다. 마을 중심부에는 모임용 공용 데크가 마련되어 있어 마을 회의, 축제, 잔치 등이 열린다. 이런 구조는 단순한 공간 기능을 넘어서, 수상 마을 전체가 하나의 협동 공동체로 작동하고 있다는 점을 건축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다.

수상 교통 체계와 건축의 연결성

이 수상 마을은 건축과 교통이 완전히 통합된 구조라는 점에서 매우 독특하다. 집과 집 사이의 연결 통로뿐만 아니라, 마을 전체를 관통하는 수상 골목길(water alley)이 존재하며, 이를 통해 작은 모터보트인 ‘펌붓(Pambut)’이 택시처럼 운행된다. 특히 오전과 오후의 출퇴근 시간, 아이들이 학교에 가는 시간대에는 보트가 줄지어 움직이며 마치 도심의 도로처럼 교통 혼잡을 일으키기도 한다. 이때 생기는 물결에 대비해 주택 구조는 말뚝 간격, 데크 배치, 기초 흔들림 최소화를 고려해 설계된다. 주민들은 배로 이동하며 상점, 학교, 사원, 병원에 방문하며, 이는 수상생활이 단절된 것이 아니라 매우 역동적이고 일상적으로 움직이는 삶의 방식임을 보여준다.

이러한 차량 흐름은 주택 설계에도 깊게 반영된다. 대부분의 집은 출입구가 두 방향으로 열려 있는데, 하나는 부교를 통한 보행자 출입용, 다른 하나는 배를 통해 직접 집으로 접근하는 수로 출입구다. 이 수상 출입구는 종종 지붕이 덮인 소형 선착장 형태로 되어 있으며, 배를 정박하고 물건을 싣고 내리는 작업이 편리하도록 구조화되어 있다. 집 내부도 교통 동선에 따라 기능이 나뉘는데, 수상 입구 쪽은 어업 작업 공간이나 창고, 육지 연결 데크 쪽은 손님 맞이 공간과 거실로 나뉘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평면 구성은 단순한 구조가 아니라, 이동 경로에 따라 집의 성격이 유동적으로 구분되는 실용적 설계라 할 수 있다.

특히 상업적 기능을 수행하는 수상 가옥에서는, 건물 일부가 작은 매점이나 물류 선착장 역할을 병행한다. 일부 가정은 수족관 형태의 수조를 설치하여 게, 조개, 생선을 살아 있는 상태로 보관하고, 이를 바로 배에 싣고 도시 시장이나 식당에 유통시키는 수상형 소규모 어업 플랫폼으로 활용한다. 이 과정은 가족 단위의 노동 구조로 유지되며, 주택이 생산·보관·운송이 연결된 하나의 ‘수상 공방’처럼 기능하기도 한다. 이러한 구조는 특히 어업과 상업이 분리되지 않고, 주거와 경제가 융합된 전통적 생활 방식의 건축적 구현이라 볼 수 있다.

또한 이 교통 체계는 지역 주민들 간의 사회적 연결성을 강화하는 데에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 배를 타고 매일 이웃을 만나고, 부교에서 우연히 마주치고 인사를 나누며, 수상 통로 자체가 커뮤니케이션 공간으로 기능한다. 이는 콘크리트 도로와는 다른 유동적이고 유연한 사회 공간을 형성하며, 마을 전체가 하나의 '공동 수상 네트워크'처럼 작동하는 구조다. 정박 데크 근처는 마을 회의, 축제, 놀이, 임시 시장 등의 공간으로도 변모하며, 교통과 공간이 결합한 수상 생활문화의 핵심 무대가 된다.

이처럼 브루나이의 캄퐁 아이에르에서는 배와 집, 교통과 건축이 단절된 요소가 아니라, 상호 적응하고 연결되어 있는 생활의 전부라 할 수 있다. 교통은 단순한 이동 수단이 아니라, 공간을 분절하지 않고 흐르게 하는 도구이며, 건축은 그것을 수용하고 확장하는 ‘떠 있는 도시’의 골격이 된다.

현대화 흐름과 전통 수상 마을의 보존 노력

브루나이 정부는 1980년대 이후 도시 인프라 정비와 현대 아파트 단지 확대를 추진하면서 수상 마을 주민의 일부를 육지로 이주시켰고, 수상 가옥에 대한 철거 계획도 검토된 적 있다. 그러나 많은 주민은 수상생활이 단지 빈곤의 결과가 아니라, 문화와 정체성을 담은 삶의 방식이라며 자발적으로 거주를 유지해 왔다. 이에 따라 정부는 2000년대 중반부터 수상 마을 보존과 현대화 병행 정책으로 전환했고, 전통 건축을 유지하면서도 상하수도, 전기, 통신 시설을 연결하는 방식의 공공사업을 시행 중이다.

현재 일부 마을은 전통 목재 건축 방식은 유지하면서도 태양광, 생태 화장실, 해수 정화 시스템 등을 접목한 ‘에코 수상 주택’ 실험도 이어가고 있다. 또한 관광 자원으로도 주목받으면서, 일부 전통 가옥은 체험형 게스트하우스, 문화관광 센터, 공예 워크숍 등으로 활용되고 있다. 중요한 것은, 이 과정이 단순한 보존이 아니라 현대 생활 조건 속에서 ‘물 위의 공동체’를 어떻게 지속시킬 수 있는가에 대한 실험이라는 점이다. 브루나이의 수상 마을은 그 자체로 건축적 지혜, 생태 감수성, 공동체의 기억이 함께 떠 있는 공간이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