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남아시아 건축

동티모르 원형 주택과 집단주의가 만든 건축 질서

동남아시아 건축 알리미 2025. 5. 13. 22:38

동남아시아 건축은 다양한 민족과 지형, 종교에 따라 각기 다른 형태로 발전했지만, 공통으로 자연환경과 공동체의 삶의 방식에 깊이 뿌리내린 구조적 특성을 보여준다. 그중에서도 동티모르(East Timor, Timor-Leste)는 아직 널리 알려지지 않았지만, 고산지대와 해안 평야에 거주하는 토착 민족들이 유지해 온 전통 주택 양식은 매우 독창적이다. 특히 ‘우마 루루(Uma Lulik)’이라 불리는 전통 원형 초가 주택은 단순한 거주 공간이 아니라 집단주의 생활 철학과 조상 숭배, 공동체 의례의 중심이 되는 신성한 건축물이다.

이 글에서는 동티모르의 전통 원형 주택이 어떻게 집단생활을 위한 구조로 설계되었는지, 그 내부 배치와 상징적 의미가 공동체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를 살펴본다. 동티모르의 주거 문화는 규모는 작지만, 건축이 공동체의 윤리와 기억, 권력을 공간적으로 실현한 형태라는 점에서 동남아시아 건축사 속에서도 독자적인 위치를 차지한다.

전통 원형 초가 주택 ‘우마 루루’의 구조적 특징

동티모르의 ‘우마 루루(Uma Lulik)’는 전통적으로 원형 혹은 정사각형 바닥 면적에 뾰족하게 솟은 초가지붕이 얹힌 고상식 구조다. 평균 직경은 약 5~7미터이며, 중앙에는 굵은 기둥(‘토쿤’)이 세워져 집 전체의 중심을 잡는다. 이 기둥은 단순한 구조물 이상의 상징성을 가지며, 하늘과 조상을 연결하는 축, 또는 남성적 권위의 상징으로 여겨진다. 반면, 지붕 아래 바닥은 가족 구성원과 공동체가 둘러앉아 생활하고 의식을 치르는 ‘땅의 공간’, 즉 여성적 공간으로 인식된다.

외벽은 나무판자나 진흙, 대나무로 만들어져 있으며, 창문은 없거나 매우 작다. 출입문은 대개 하나로, 동쪽 혹은 남동쪽을 향해 있으며, 이는 해가 떠오르는 방향을 향한 생명의 에너지 흡수라는 상징적 설계다. 바닥은 나무판을 얹고 흙으로 다져 만들며, 중앙에는 화로가 놓여 있어, 식사, 제사, 회의 등 모든 공동 활동이 중앙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구조다. 이런 공간 구성은 건축이 자연, 조상, 공동체를 하나의 원 안에 담아내려는 시도임을 보여준다.

공동체 중심의 공간 배치와 역할 분담

우마 루루의 내부는 방이 따로 구획되지 않는다. 대신 공간의 위치와 거리, 앉는 순서에 따라 계층과 역할이 정해진다. 중앙 기둥 근처에는 가장 연장자, 족장, 제사장이 앉으며, 그 주변으로 가족과 이웃이 나선형으로 앉는다. 이는 단순한 생활 방식이 아니라, 권위의 중심과 존중의 거리가 시각적으로 구현된 방식이며, 누가 어디에 앉는가가 공동체 내에서의 위치와 존경을 결정짓는 중요한 요소다.

또한, 이 주택은 개인의 거주 공간이 아니라 한 가문 또는 여러 가정이 공동으로 사용하는 ‘의례 공간’으로 기능하기도 한다. 실제로 일부 가정은 일상적인 생활은 인근 현대식 주택에서 하되, 결혼식, 제례, 족장 회의, 공동 취사 등은 우마 루루에서 진행한다. 이러한 기능은 공간 자체가 공동체 생활의 실천 무대이며, 사회 질서와 공동의 기억을 공유하는 장치로 작동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동티모르에서는 공간을 소유하는 것보다, 어떻게 공유하느냐가 더 중요한 가치로 여겨지는 것이다.

 

동티모르 원형 주택과 집단주의가 만든 건축 질서

상징과 의례가 스며든 건축적 언어

우마 루루는 단지 ‘사는 집’이 아니라 신과 조상이 머무는 집, 그리고 집단 정체성을 시각화한 상징적 구조물이다. 특히 지붕은 단순한 덮개가 아니라 조상신이 하강하는 문, 기둥은 가문을 이어주는 혈통의 축, 그리고 출입구는 인생의 시작과 끝이 통과하는 의례적 통로로 간주한다. 실제로 우마 루루의 내부에는 위패, 제물, 조상 유물, 족보 상징물 등이 중앙 기둥 주변에 배치되어 있으며, 이는 모두 조상 숭배와 공동체 보호의 기능을 수행한다.

정기적으로 열리는 ‘타라비(Tarabe)’라는 제례 의식에서는 이 공간에 마을 전원이 모여 고기를 굽고, 기도를 올리며, 조상에게 바치는 노래와 춤을 올린다. 이러한 의례는 주거 공간에서 이뤄지는 생활과 정신문화의 경계를 무너뜨리며, 건축이 곧 신앙이자 공동체 통합의 수단이라는 사실을 실감하게 한다. 특히 젊은 세대는 이 공간에서 조상과 마을의 역사, 살아있는 규범을 몸으로 익히며, 교육과 전승의 공간 역할도 함께 수행된다.

현대화 속에서 이어지는 전통 주택의 보존 노력

동티모르는 2002년에 독립한 이후, 수도 딜리를 중심으로 점차 도시화가 진행되고 있으며, 콘크리트 주택과 정부 지원형 조립식 가옥이 늘어나고 있다. 그러나 지방 마을, 특히 고산지대에서는 여전히 우마 루루가 의례 중심의 건축으로 기능하고 있으며, 최근에는 이를 국가 문화유산으로 지정하고 복원 및 보존하는 움직임이 활발하다. 일부 지역에서는 관광자원을 활용한 전통 주택 체험 마을을 운영하고 있으며, 이 과정에서 현지 장인과 젊은 건축가들이 협업해 전통 설계를 현대 재료와 결합하려는 시도도 이어지고 있다.

특히 2020년 이후에는 유네스코와 협력한 건축 보존 프로그램이 시작되어, 목재 방부 처리 기술, 지붕 내화 설계, 배수 구조 개선 등을 통해 전통 주택의 기능성을 높이는 동시에 형태와 정신성은 그대로 유지하려는 방향으로 복원이 이뤄지고 있다. 이는 단지 옛 건물을 보존하는 것을 넘어, 공동체의 삶의 방식과 공간 철학을 후대에 계승하려는 건축적 실천이기도 하다. 동티모르의 우마 루루는 규모는 작지만, 그 안에 담긴 상징과 구조, 사람들의 이야기는 동남아시아 건축이 가진 가장 순수하고 근본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