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남아시아 건축

수마트라 바탁족 가옥과 곡선 지붕에 담긴 계층의 상징성

동남아시아 건축 알리미 2025. 5. 12. 22:10

동남아시아 건축은 단순한 생존을 위한 구조물 그 이상이다. 그것은 공동체의 역사와 철학, 계층과 역할, 상징과 신화를 건축으로 표현하는 문화적 언어다. 인도네시아 수마트라 섬 북부에 거주하는 바탁(Batak)족의 전통 가옥인 ‘루마 아다트(Ruma Adat)’는 이러한 특성을 잘 보여주는 사례 중 하나다. 특히 독특한 곡선 지붕 구조, 과장된 장식, 내부 공간 배치 방식은 사회적 위계질서와 공동체 정체성을 물리적 공간 안에 그대로 구현하고 있다.

이 글에서는 바탁족의 전통 가옥이 어떻게 건축적으로 계층과 신분, 신화적 세계관을 반영하고 있는지, 그리고 곡선 지붕이라는 구조물이 단지 심미적 장치가 아닌 문화적 코드로 작용하고 있는지를 살펴본다. 이를 통해 동남아시아 건축이 보여주는 형태와 의미의 밀착성을 재확인할 수 있다.

바탁족 곡선 지붕의 구조와 의미

바탁족 전통 가옥의 가장 인상적인 특징은 바로 배의 형상을 닮은 곡선형 지붕이다. 이 지붕은 건물 중심부에서 양쪽으로 부드럽게 휘어 오르며, 마치 양쪽 끝이 하늘을 향해 벌어진 뿔처럼 보인다. 바탁족은 이를 ‘부크이트(Bukit)’, 즉 ‘산등성이’라고 부르며, 하늘과 조상을 향한 존경의 표현으로 간주한다. 이 곡선 지붕은 단순한 조형물이 아니라, 상징적으로는 하늘-인간-조상의 연결 고리, 구조적으로는 비와 열을 효과적으로 분산시키는 실용적 장치다.

지붕은 여러 겹의 목재 프레임과 대나무, 야자잎, 때로는 아연판을 혼합해 구성되며, 꼭대기에는 종교적 또는 상징적 조형물이 장식된다. 특히 족장 집이나 제사장이 거주하는 건물의 지붕에는 ‘보루탄(Borotan)’이라 불리는 조각 문양이 삽입되며, 이는 혈통, 신화, 권위를 시각적으로 드러내는 수단이다. 이처럼 곡선 지붕은 단지 눈에 띄는 형태가 아니라, 건축 그 자체가 말하는 언어라고 할 수 있다.

내부 공간 구성과 사회 계층의 반영

바탁족 가옥은 외형만큼이나 내부 공간 구성에도 철저한 계층적 질서를 반영한다. 보통 한 가옥에는 여러 세대가 함께 거주하는데, 내부는 계층, 나이, 역할에 따라 구역이 나뉜다. 입구에서 가장 먼 쪽은 족장 또는 가문 대표가 사용하는 가장 권위 있는 공간이고, 입구 근처는 방문객이나 젊은 세대, 외부인을 위한 자리다.

중앙은 공동생활공간으로, 가족회의, 조상 숭배, 축제 의식이 진행되는 곳이다. 이 구조는 단순한 기능 구분이 아니라, 신체 위치와 계급을 동일시하는 전통 사고방식에 기반한다. 바닥은 계층을 따라 높낮이를 달리하거나, 특정 공간에 제단을 둬 신성성과 위계를 동시에 표현하기도 한다. 이러한 설계는 바깥에서 봤을 땐 하나의 큰 지붕 아래 평등하게 보일 수 있지만, 내부로 들어오면 공간 그 자체가 권위와 질서를 구현하는 구조임을 알 수 있다.

수마트라 바탁족 가옥과 곡선 지붕에 담긴 계층의 상징성

조형 언어와 상징 문양의 건축적 통합

바탁족 가옥은 지붕과 벽, 기둥, 문, 창틀까지도 복잡하고 정교한 상징 문양으로 가득 장식되어 있다. 이 문양들은 단순한 장식이 아니라, 가문의 역사와 신앙, 조상 숭배와 자연에 대한 경외심을 담은 시각적 언어다. 특히 바탁족은 ‘조형’을 단순한 미적 요소가 아니라 보호와 정체성의 수단으로 여긴다. 목재에 새겨진 문양은 집의 보호막이자 정체성의 휘장처럼 기능하며, 외부로부터의 악령, 나쁜 기운, 질병 등으로부터 가족을 지켜주는 영적 장치로 해석된다.

대표적인 문양으로는 ‘기노갈(Kinogal)’이 있다. 이는 도마뱀의 형상을 본뜬 문양으로, 바닥에서 벽으로 기어오르는 형태로 묘사되며, 조상과 인간 세계를 연결하는 중재자를 상징한다. 바탁 신화에서 도마뱀은 지하 세계와 조상의 영역을 자유롭게 넘나드는 존재로 여겨지며, 기노갈 문양이 집의 기둥과 벽 사이에 새겨지는 이유도 바로 영혼의 순환과 보호의 의미 때문이다.

또한 ‘수칼로토(Sukaloto)’는 소용돌이 형상으로, 생명의 순환, 씨족 간 유대, 조상 피의 계보를 상징한다. 이 문양은 보통 집 정면 중앙, 특히 입구 위 기둥과 이마판(frontal gable)에 큼직하게 배치되며, 외부로부터 바라보는 이들에게 ‘이 집이 어떤 가문이며 어떤 정신을 이어받았는가’를 시각적으로 선언하는 역할을 한다. 이 밖에도 불꽃 모양의 ‘불레(Bule)’, 바람결을 상징하는 ‘앙인(Angin)’, 뿔 모양의 ‘타노스(Tanos)’ 같은 다양한 문양이 있으며, 이들은 조화롭게 배열되어 건물 전체에 이야기처럼 흘러가는 조형적 흐름을 만든다.

문양 제작은 주로 마을의 ‘토노툭(Tonotuk)’이라 불리는 조각 장인이 담당하며, 세대를 거쳐 기술이 전수된다. 장인은 나무를 고르는 것부터 시작해 문양 배치의 순서, 조각 깊이, 색칠 방식까지 모든 과정을 일정한 의례와 함께 수행한다. 조각은 단순한 노동이 아니라 조상의 허락을 받는 종교적 행위로 여겨지며, 주요 문양은 절대 방향이나 순서를 바꾸지 않는다. 일부 마을에서는 조각을 시작하기 전에 족장의 허락과 조상 제단 앞에서의 정화 의식을 거치는 전통도 지금까지 남아 있다.

흥미롭게도 외부에 새겨진 문양과 내부에 배치된 문양은 그 의미가 다르다. 외부 문양은 주로 대외적 위상과 가문의 권위를 나타내며, 보는 이로 하여금 경외심을 느끼게 하는 기능을 한다. 반면, 내부에 새겨진 문양은 생활과 의례 속에서 거주자들이 조상과 교감하고, 영적 질서를 느끼는 도상(圖像)의 역할을 한다. 예를 들어, 부엌 근처에는 불의 정령을 진정시키기 위한 소용돌이 문양이, 족장 좌석 뒤에는 선조의 눈을 의미하는 삼각형 패턴이 새겨져 있어, 공간의 기능과 상징이 긴밀하게 연결된다.

이처럼 바탁족의 조형 언어는 집 그 자체를 하나의 신화적 상징물로 탈바꿈시키며, 주거 공간을 단순한 생활의 틀을 넘어서 기억, 계승, 보호, 교감의 장으로 확장한다. 외부인이 바라봤을 때 그저 아름다운 전통 가옥으로 보일 수 있지만, 바탁족 구성원들에게 이 가옥은 문양을 통해 끊임없이 조상과 대화하는, 살아 있는 정신적 건축물이라 할 수 있다.

현대화 속 전통 가옥의 계승과 실험

수마트라의 도시화가 진행되면서 바탁족 전통 가옥은 점차 감소하고 있지만, 여전히 톱토바(Toba), 시말룽운(Simalungun), 카로(Karo) 지역 등에는 많은 전통 가옥이 보존되고 있다. 일부는 관광 명소로서 기능하고, 또 일부는 현대 재료를 활용한 복원 건축으로 계승되고 있다. 현대 바탁 건축가 중 일부는 콘크리트와 유리, 철골 구조에 전통 곡선 지붕을 조화롭게 접목한 하이브리드 디자인을 실험하며, 전통의 형태를 유지하면서도 기능적 효율성을 강화하는 설계 모델을 만들고 있다.

중요한 점은, 이 곡선 지붕이 여전히 신분과 정체성의 상징으로 사용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현대식 학교, 회관, 박물관에 이 지붕을 적용해 공동체 소속감을 시각적으로 표현하거나, 도시 설계 속에 전통 건축 언어를 담아내는 상징적 장치로 쓰이기도 한다. 이처럼 바탁족 가옥은 단지 민속 건축이 아니라, 지금도 살아 있는 문화적 텍스트이자, 동남아시아 건축이 어떻게 정체성과 권위를 공간으로 구현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귀중한 사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