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남아시아 건축

태국 치앙라이 아카족 주거지의 언덕 경사형 건축 방식

동남아시아 건축 알리미 2025. 6. 15. 13:47

태국 북부 치앙라이(Chiang Rai) 지역의 산악 지대에는 수 세기 동안 고유의 문화를 지켜온 소수 민족 아카족(Akha) 이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들은 해발 1,000미터 내외의 급경사 언덕에 거주하며, 지형의 불안정성과 급격한 강우량 변화, 산사태 위험을 건축적으로 대응하는 독특한 주거 문화를 형성해 왔습니다. 아카족의 주거지는 단순히 산속에 지은 집이 아닙니다. 그것은 언덕이라는 제한된 지형을 활용하면서도 안전성과 생존 가능성을 최대한 확보한 입체적 설계 방식의 결정체라 할 수 있습니다. 특히 이들의 주택은 현대식 공법 없이도 오랜 세월 무너지지 않는 내구성을 유지하며, 자연환경을 존중하는 ‘수용형 건축’의 좋은 사례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경사면을 다듬는 땅 고르기 기술

아카족 주거지 건축의 첫 단계는 경사면을 선택하고 자연 지형에 최소한으로 개입하는 터 닦기 작업입니다. 산을 깎아 평지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경사를 따라 계단식 평탄지(terrace)를 소규모로 조성합니다. 이를 통해 토사 붕괴를 최소화하고, 빗물 흐름을 자연스럽게 분산시키는 배수 경로를 확보합니다. 터 기초부는 주로 나무뿌리와 얽힌 흙을 그대로 활용하거나, 간단한 돌 쌓기로 보강합니다. 이런 방식은 흙의 유동성을 일부 남겨두면서도 무게를 분산시키는 전통적 사면 안정화 기술입니다. 비가 많이 오는 우기에도 이 구조는 흙이 갑자기 무너지는 산사태를 방지하며, 건물 하부의 압력을 효과적으로 흡수합니다. 특히 집의 뒷부분은 경사면에 바짝 붙여 지어지며, 앞부분은 기둥으로 떠받쳐 부분 고상 구조 형태를 형성합니다. 이를 통해 불안정한 경사면 전체를 차지하지 않고, 자연 지형 위에 떠 있는 안정된 플랫폼을 만들게 됩니다.

구조물 재료와 하중 분산 설계

아카족 주택의 구조물은 대부분 목재와 대나무로 이루어집니다. 경량 재료를 사용하는 이유는 산악 경사면이 무거운 하중을 지속해서 지탱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주 구조물은 굵은 대나무 기둥과 가로보로 지지며가 되며, 기둥 간격은 바람과 지면의 진동을 흡수하도록 좁게 배치됩니다. 바닥은 대나무 슬랫으로 만들어 바람과 습기의 영향을 줄이며, 강한 빗물에도 빠르게 건조됩니다. 또한 바닥 아래 공간이 개방되어 있어서 지면과의 직접 접촉을 줄여 습기 및 곤충 피해를 예방합니다. 이러한 부분 고상식 설계는 경사면이 가진 불안정성을 그대로 흡수하면서도 집이 안정적으로 지탱되도록 만드는 핵심 기술입니다. 지붕은 급경사 형태로 설계되며, 대부분 풀짚, 야자잎, 또는 건조 대나무판을 엮어 마감합니다. 높은 지붕 경사는 집중 호우 시에도 빗물이 빠르게 흘러내리도록 하며, 지붕재가 흡수하는 수분량을 최소화합니다. 가벼운 지붕 구조는 바람에도 유연하게 흔들리며, 파손 위험을 크게 줄여줍니다.

생활과 생산이 통합된 입체형 주거

아카족의 주거는 단순한 거주 공간이 아니라 생산과 의례, 생활이 하나로 통합된 복합 구조를 갖습니다. 집의 가장 안쪽에는 부엌과 가족 수면 공간이 배치되고, 앞부분 고상형 확장 구역에는 곡물 건조장, 가축 보관소, 농기구 창고가 마련됩니다. 이러한 배치는 생활 편의성만 아니라 급경사 지형에서의 하중 분산에도 기여합니다. 무거운 곡물 저장 공간을 집 뒷부분에 배치하지 않고 상대적으로 하중 부담이 적은 앞쪽 고상부에 두어 구조적 안정성을 유지하는 방식입니다. 또한 창고는 바람 통로 방향을 고려해 설치되어, 자연 건조와 곰팡이 방지를 동시에 실현합니다. 이외에도 주거 주변에는 야채밭, 돼지우리, 가금류 사육장이 테라스형으로 배치되며, 마을 전체가 언덕을 따라 계단식으로 조직됩니다. 이로써 아카족의 마을은 전체적으로 하나의 거대한 입체 농업·거주 복합체로 운영됩니다.

의례 공간과 공동체적 건축 확장

아카족의 마을 중심에는 종종 조상 숭배용 제단이나 공동 집회소가 설치되며, 이 공간 역시 경사면 위에서 특별한 기초 설계를 따릅니다. 공동 집회소는 대부분 나무기둥으로 지탱되며, 주변에는 돌담을 두르거나 흙을 보강해지면 안정성을 유지합니다. 이러한 구조물은 자연재해뿐 아니라 공동체 행사, 제사, 축제의 중심이 되어 마을 정체성과 결속력을 상징하는 건축적 상징물로 자리를 잡습니다. 의례 공간은 마을 확장 과정에서도 중심이 유지되며, 새로운 주택들은 자연스럽게 이를 둘러싸며 순환형 확장 패턴을 만들어냅니다. 이러한 마을 구조는 산악 환경에서도 사회적 응집력을 유지하는 데 큰 역할을 담당합니다.

태국 치앙라이 아카족 주거지의 언덕 경사형 건축 방식

현대화와 지속 가능한 적응

최근 몇 년간 치앙라이 지역에도 관광 개발과 현대 인프라 확장이 진행되면서 아카족의 전통 건축에도 변화가 나타나고 있습니다. 일부 주택은 철제 지붕, 시멘트 기초, 플라스틱 방수층을 도입하고 있으며, 이를 통해 유지보수의 편의성과 내구성을 강화하려는 시도가 늘어나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카족 일부 공동체는 전통 방식과 현대 기술의 균형을 유지하려는 시도를 펼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전통 지붕 경사는 유지하되, 지붕 마감재로 합성 방수지를 내부에 덧대어 강우 차단 성능을 보강하는 방식이 있습니다. 또한 일부 지역에서는 관광 체험 마을이 조성되며 전통 주택의 미학적 요소를 보존하는 문화 보전형 주거 설계가 도입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변화 속에서도 아카족 경사형 건축의 기본 원리인 지형 순응, 경량 설계, 하중 분산, 수분 조절이라는 전통적 철학은 크게 변하지 않고 유지되고 있습니다.

급경사 건축이 남긴 현대적 교훈

치앙라이 아카족의 경사형 주택은 단순히 산속에 지어진 집이 아닙니다. 그것은 위험한 지형에서도 생존 가능성을 높이는 지혜로운 공간 운영법이며, 오늘날 도시개발에서도 참고할 수 있는 지형 친화형 건축 전략을 보여줍니다. 현대 도시가 자꾸만 평지를 선호하고 대규모 토목공사로 자연을 파괴하는 것과 달리, 아카족의 방식은 자연 훼손을 최소화하면서 안정성을 확보하는 건축법으로 평가받습니다. 특히 기후 변화로 산악지대의 재해 위험이 커지는 시대에 이들의 축적된 경험은 재난 회복력(resilience)이 높은 건축 설계로 주목받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