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남아시아 건축은 단순히 인간의 편의를 위한 구조물이 아니라, 자연과의 조화와 공동체의 윤리를 담아내는 구조적 언어다. 그중에서도 태국 북부 산악지대에 거주하는 소수민족 카렌족(Karen)의 전통 가옥은 자연을 지배하거나 고정하지 않고, 생태에 순응하며 이주하는 삶의 방식을 반영하는 독특한 사례다. 이들은 대개 1~2년마다 거처를 옮기며 이동식 목조 가옥을 짓고 해체하는 방식으로 생활을 지속해 왔다.
이 글에서는 카렌족의 이동식 전통 가옥이 어떻게 자연 윤리와 공동체 가치, 건축 기술이 결합한 구조인지를 살펴본다. 이는 고정된 주택과 뿌리내림을 당연시하는 현대 건축 담론과는 다른, 자연에 대한 존중과 공존의 방식이 건축으로 실현된 독특한 형태라 할 수 있다.
이동식 목조 가옥의 구조와 건축 방식
카렌족의 전통 주택은 ‘탈로 탈로(Talo Talo)’라고 불리며, 보통 목재, 대나무, 야자잎, 얇은 나무껍질 등 현지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재료로 구성된다. 집은 지면에서 1~2미터 띄운 고상식 구조로, 평지보다는 산등성이의 완만한 경사면을 따라 세워진다. 기둥은 못이나 콘크리트 없이 단단히 얽은 대나무와 나무 끈으로 결속되며, 해체 시에는 각 재료를 다시 회수해 재사용할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다.
지붕은 이엉(초가지붕) 형태이며, 경사가 급해 비를 빠르게 흘려보낼 수 있고, 내부 공간은 방 하나와 다목적 공용 공간, 바깥쪽에 작은 데크형 요리 공간으로 이루어진다. 흥미로운 점은 이러한 집들이 ‘해체를 전제로 한 임시적 건축’이라는 것이다. 일정 기간이 지나거나 경작지를 옮기게 되면, 가옥은 해체되어 다른 장소에 그대로 재조립되거나 남은 재료를 그대로 산에 반납한다. 이 방식은 자연을 소모하지 않고 빌려 쓰는 방식의 생태적 건축 윤리로 해석될 수 있다.
자연과 공존하는 카렌족의 생태 윤리
카렌족의 건축 방식은 단지 기술이 아니라 삶의 철학을 담고 있다. 그들은 자신들의 정체성을 “산에 뿌리내리지 않고, 산에 스며드는 사람들”이라고 말한다. 집을 짓는 것은 거처를 ‘점유’하는 것이 아니라, 일시적으로 머무는 공간을 구성해 자연과의 균형을 유지하려는 행위다. 이들은 “땅은 누구의 것도 아니다”라는 말을 자주 쓰며, 산과 숲을 가문의 소유가 아닌, 세대를 잇는 자연의 일부로 간주한다.
특히 주목할 점은 건축과 이농(移農) 방식의 연결이다. 카렌족은 일정 기간 같은 땅에서 농사를 짓다가, 땅이 스스로 회복할 시간을 갖도록 경작지와 주거지를 함께 옮긴다. 이 과정에서 이동식 가옥이 핵심적인 역할을 하며, 건축 자체가 자연 회복 주기에 맞춘 윤리적 도구로 작동한다. 이는 서구식 ‘정착 건축’과는 완전히 다른 가치 체계로, 건축이 자연 파괴가 아닌 회복을 위한 수단이 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다.
공동체 구조와 건축의 관계
카렌족은 가옥을 가족 단위로 짓지만, 그 내부 구조와 배치는 공동체 중심 사고방식을 반영한다. 예컨대 대부분의 가옥은 동향 또는 남동향으로 입구가 나 있으며, 이는 해 뜨는 방향에 몸을 열어 생명을 환영하고, 악령을 피한다는 전통적 신념에서 비롯된 것이다. 내부에는 중앙 화로가 위치하고, 이 주변에서 가족의 식사, 공동 작업, 의례 행위가 모두 이루어진다.
주택들은 마을 단위로 일정 간격을 두고 비슷한 방향으로 배치되며, 서로의 집이 풍향, 일조량, 접근성 등을 침해하지 않도록 조율된다. 이는 공동체 내부에서 물리적 공간 질서를 통해 윤리적 조화를 이뤄내는 방식이라 할 수 있다. 또한, 가옥을 짓는 과정은 가족만의 일이 아니라 마을 전체가 함께 돕는 공동 노동으로 진행되며, 건축이 단지 물리적 생산이 아닌 사회적 유대의 강화 과정이 된다.
특히 장례, 결혼, 축제 등의 주요 행사는 가옥과 가옥 사이 또는 마을 공터에서 진행되며, 이때 임시 구조물이나 천막 형태의 공간이 빠르게 조립되었다가 다시 철거된다. 이런 방식은 건축이 영구적 구조물이 아닌 유기적 기능의 집합이라는 카렌족의 공간 인식을 잘 보여준다.
현대화 속 전통 주거의 변화와 계승
최근 몇십 년 사이, 태국 정부는 고산 부족에 대한 개발 정책 일환으로 고정 주거 정착을 장려해 왔다. 이에 따라 일부 카렌족 마을에서는 콘크리트 기반의 정착형 주택이 들어서고, 정기적인 이동을 제한받는 경우도 생겼다. 그러나 많은 카렌족 공동체는 여전히 전통 방식의 이동 주택을 유지하거나, 혼합형 구조(이동식 + 고정식)를 도입하고 있다.
또한, 일부 카렌 공동체는 전통 가옥과 이동 생활의 가치를 외부에 알리기 위해 문화 교육, 생태 관광, 공동체 농업 워크숍을 운영하고 있으며, 이 과정에서 ‘지속 가능한 이동 건축’이라는 개념을 도시 건축가들과 공유하고 있다. 최근 몇몇 건축가들은 카렌족 이동 주택의 구조 원리를 참고해, 재난 대응용 긴급 주거, 기후 회복형 건축물에 응용하는 실험도 이어가고 있다.
이런 시도는 카렌족의 전통 건축이 단지 ‘옛 방식’이 아니라, 지속가능성과 윤리적 거주 방식의 대안이 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지점이다. 건축을 통해 자연에 대한 존중, 사회적 연대, 유연한 삶의 철학을 구현하고 있다는 점에서, 카렌족의 가옥은 단지 작은 산악 마을의 이야기를 넘어 21세기 건축 윤리에 던지는 메시지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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