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남아시아 건축은 자연환경과 종교뿐만 아니라, 이동과 혼종의 역사 속에서 만들어진 다층적인 문화 표현 방식이다. 특히 말레이시아 남부의 조호르(Johor) 지역은 말레이반도와 싱가포르 사이의 전략적 위치로 인해 수백 년간 중국계, 인도계, 아랍계, 유럽계 이민자들이 밀집하여 형성한 다문화 도시 환경을 갖추고 있다. 그 중심에는 19세기 이후 정착한 중국계 이민자들의 전통 건축이, 말레이-이슬람적 건축 양식과 결합하며 독창적인 양식을 형성했다. 이민자 건축은 단순히 고향의 양식을 복제한 것이 아니라, 현지 기후, 토착 문화, 공동체의 필요성에 따라 유연하게 변형된 ‘융합형 건축’이다. 특히 조호르에서는 중국계 클랜 하우스(clan house), 상점 주택(shop house), 사원 등에서 이런 혼합 양식이 두드러지며, 지붕, 벽면 장식, 공간 배치, 색채 구성 등에서 중국·말레이·이슬람·서구식 요소가 함께 공존한다. 여기에서는 조호르의 중국계 이민 건축이 어떻게 다문화적 요소를 수용하고 공간으로 번역했는지를 중심으로 살펴본다.
중국계 상점 주택(Shop House)의 하이브리드 구조
조호르 주 조호르바루(Johor Bahru) 도심과 마을 중심부에는 수많은 전통 중국계 상점주택(Shop House)이 남아 있다. 이 건축물은 1층은 상업 공간, 2층은 주거 공간으로 구성되며, 길게 뻗은 직사각형 평면 구조와 전면 중심형 배치가 특징이다. 그런데 조호르의 상점주택은 중국 본토의 복사판이 아니다. 이 지역에서는 열대기후에 맞춘 깊은 차양 구조, 말레이 전통 ‘버라우(Berauk)’ 스타일의 통풍창, 이슬람 아치 모양 창틀 등 다문화적 요소가 혼합된 구조가 보인다. 지붕은 원래의 중국식 용문양 기와 지붕을 기본으로 하되, 말레이식 첨탑 지붕이나 박공지붕 형식의 환기 구조가 더해지며, 벽면에는 이슬람 양식에서 유래한 다공창(lattice window)이 설치되기도 한다. 특히 중요한 요소는 ‘파사말람(pasar malam)’과 같은 야시장의 확장 공간을 고려한 외부 데크 구조인데, 이는 인도계나 말레이계 상업 건축에서 차용된 외부 활동 구조로 간주한다. 또한, 상점주택 내부에는 불단과 말레이식 앉은뱅이 식가 공간이 공존하는 등 가족 중심성과 다신적 요소가 물리적으로 공존하는 생활 구조가 나타난다. 이러한 구조는 단지 시각적 융합이 아닌, 문화적 실천이 일상 공간에서 어떻게 병존하는지를 공간으로 드러낸 결과다.
사원과 클랜 하우스의 종교적 융합성
조호르에는 다수의 중국계 사원들이 존재하며, 이들 사원은 대개 도교, 불교, 조상 숭배가 융합된 복합 종교 공간이다. 이 가운데 일부는 이슬람식 코발트 타일, 아치형 출입구, 아랍풍 벽면 장식 등을 외부에 차용하고 있으며, 내부에는 여전히 중국 전통 향로, 붉은 등, 금색 용 조각 등이 혼재되어 있다. 조호르에서 발견되는 대표적인 융합 사원 중 하나는 고쿵(Goh Keng) 사원으로, 외벽은 말레이식 기와를 사용하고, 마당은 인도식 사각 배치와 비슷한 평면 구조를 따른다.
이러한 사원은 종교 건축이라는 정체성을 유지하면서도, 사회적 공간으로서의 개방성과 지역 문화에의 포용성을 보여준다. 실제로 일부 사원은 말레이 무슬림 이웃을 위해 금요일 낮에는 공용 휴식 공간으로 개방하거나, 라마단 기간에는 기부 활동을 함께 진행하는 등 종교를 넘어선 커뮤니티 센터 역할을 수행하기도 한다.
클랜하우스(동족회관)는 주로 광둥, 하카, 푸젠, 하이난 등 중국계 지역 출신자별로 구분되며, 건축적으로는 중국식 중정(中庭) 구조를 갖지만, 말레이식 옥외 샤워장, 남방식 열린 주방 구조가 결합한 형태가 많다. 이들은 내부 의례실에서는 엄격한 전통을 유지하면서도, 외부는 지역 다문화 사회에 적응한 형태로 진화했다.
생활 건축에서의 다문화 실천
조호르의 중국계 이민자 건축에서 다문화는 단지 구조나 장식에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가장 흥미로운 부분은 건축이 말없이 말레이시아 다문화 사회의 일상을 담는다는 점이다. 대표적으로, 많은 전통 가옥은 중국 붉은색 도장과 함께 말레이 전통에서 유래한 파스텔 그린, 연보라, 청록색 회랑 페인트를 혼합 사용하며, 이 조합은 전통 중국 건축에서는 거의 보기 힘든 색채 전략이다. 재료 사용에서도 중국식 벽돌이나 기와 대신, 말레이 전통 주택에서 자주 쓰이는 코코넛 섬유 패널, 대나무 매트, 회반죽 기와 등이 혼합된다. 바닥은 중정에서는 붉은 벽돌 타일, 외부 회랑에서는 차가운 말레이 대리석을 깔아 내부와 외부의 체감 온도를 분리한다. 주방은 말레이식 좌식 구조를 혼합하여, 손님은 의자에 앉고, 주인은 바닥에서 조리와 식사 준비를 동시에 하는 혼합형 생활 동선이 완성된다. 더불어 일부 가옥에서는 말레이 전통 의례인 하리라야(Hari Raya) 기간에 맞춰 집 외벽에 등을 달거나, 중국 설 시기에는 말레이 문양이 새겨진 천막과 현수막을 함께 거는 모습이 관찰된다. 즉, 이 건축물들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시기별로 정체성을 유동적으로 전시하는 '문화적 스크린'이 되기도 한다.
다문화 건축의 보존과 재창조
현대에 들어 조호르의 중국계 이민자 건축은 점차 개보수와 현대화 과정을 겪고 있다. 일부 상점주택은 게스트하우스, 카페, 미술관으로 전환되며, 외벽은 복원되지만 내부는 현대 설비로 채워진다. 그러나 복원 과정에서 가장 주목받는 부분은 다문화적 특징을 어떻게 유지하느냐이다. 말레이식 천장 구조를 그대로 두거나, 중국식 용문양과 말레이 패턴을 함께 타일 화한 복합 디자인, 말레이 전통 담장을 현대식 철재 프레임과 조화시킨 하이브리드 구조 등이 새롭게 도입되고 있다. 지역 사회에서는 ‘다문화 유산 건축’이라는 용어가 조심스럽게 사용되고 있으며, 조호르 주 정부와 일부 문화재단은 이러한 혼합형 건축물에 보존 등급을 부여하거나 관광자원으로 안내하는 프로그램을 진행 중이다. 교육기관과 건축학교에서는 조호르의 융합 건축을 현대 건축 디자인의 사례로 채택하기도 하며, 디지털 3D 스캔으로 원형 보존 작업도 병행되고 있다. 무엇보다 중요한 점은, 조호르의 중국계 이민자 건축이 단지 역사적 유산이 아니라, 현재도 기능하고 있는 살아 있는 생활 건축이라는 점이다. 그 속에서 사람들은 여전히 조상과 전통을 기억하면서도, 지역사회와 연결된 생활을 지속하고 있으며, 그 방식이 건축이라는 구체적인 공간 속에 물리적으로 구현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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