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남아시아 건축

발리 외곽 농촌 지역의 여성 중심 가옥 배치와 주거 경제 구조

동남아시아 건축 알리미 2025. 5. 23. 19:25

동남아시아 건축은 단지 물리적인 공간 구성을 넘어, 그 사회의 생활 방식과 역할 구분을 구체적으로 반영합니다. 그중에서 인도네시아 발리(Bali)는 독특한 종교, 가족 제도, 공동체 중심 문화로 인해 주거 건축에서 여성의 역할과 경제 활동이 분명히 구조화되어 있는 지역입니다. 특히 발리 외곽의 농촌 지역에서는 가옥 배치부터 생활 동선, 공간의 사용 목적까지 여성을 중심으로 설계된 사례를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여성 중심 구조는 단순히 여성이 집안에서 생활하는 비율이 높아서가 아니라, 전통적인 가족 경제의 핵심이자, 제례와 일상 생산을 담당하는 역할을 공간적으로 고정했기 때문입니다. 이 글에서는 발리 농촌의 전통 가옥에서 여성의 주거 구조가 어떻게 형성되었으며, 그것이 경제적 생존 전략과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를 건축의 언어로 풀어보겠습니다.

공간 중심은 여성에게 향합니다

발리의 농촌 주거는 보통 ‘콤플렉스(compound)’라는 폐쇄형 가옥 군 형태로 이루어집니다. 이 구조는 하나의 가족이 여러 세대에 걸쳐 살면서 중앙 마당을 중심으로 여러 개의 별채를 배치하는 방식입니다. 흥미로운 점은 이 중심 공간이 전통적으로 여성의 일과 돌봄의 공간으로 간주한다는 점입니다. 마당을 중심으로 부엌, 식량 저장실, 가사 노동 공간, 제례 준비 공간이 둘러싸여 있으며, 이는 모두 여성들이 주로 사용하는 동선 위에 위치합니다. 특히 부엌은 남성의 출입이 거의 없는 공간으로, 어머니나 장녀가 공간을 관리하며 가족의 식생활과 가정 경제의 운영을 책임지는 중심 역할을 수행합니다. 또한, 가옥 내에서 수행되는 정기적인 제례 의식(가믈란 음악, 향 공양, 조상 제사 등)도 대부분 여성에 의해 준비되며, 이와 관련된 물품의 보관이나 제작 공간이 주거지 내에 고정적으로 존재합니다. 이러한 점은 공간의 구조가 곧 사회적 역할 분담의 표현임을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조리 공간은 생산 공간입니다

발리 전통 가옥에서의 부엌은 단순한 요리 공간을 넘어선 생산의 중심지입니다. 특히 외곽 농촌 지역에서는 부엌이 가정 경제의 출발점이자 여성들의 사회적 기여가 가장 활발하게 이루어지는 곳으로 기능하고 있습니다. 이곳에서는 하루 세끼를 준비하는 일 외에도, 떡(끄레뻬), 향(깜방), 제례용 공예품, 바나나잎 요리, 향초, 건과일 포장 등 다양한 전통 생산 활동이 함께 이루어집니다. 단순히 ‘먹을 것을 만드는 공간’이 아니라, 상품을 직접 제작하고 분류하며 포장하는 ‘가내 생산소’의 성격을 지니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가내 생산품은 마을 시장(pasar desa)이나 사원 축제, 공동체 교환 행사 등에서 유통되며, 일부는 관광객 대상 기념품으로도 판매됩니다. 부엌과 연결된 경제 활동은 대부분 여성 주도로 이루어지며, 여성들은 이 공간에서 생산자이자 관리자, 판매자, 심지어 전통문화 전달자의 역할까지 동시에 수행합니다. 대부분의 발리 농가에서는 부엌 옆에 반개방형 작업 공간인 ‘바레 다페르(bale dapur)’를 따로 설치합니다. 이 공간은 부엌의 기능을 확장한 곳으로, 수공예와 농산물 가공, 향·제물 준비, 마른 재료 건조, 포장 작업 등을 동시에 수행할 수 있는 다목적 장소입니다. 바레 다페르는 바닥이 낮게 개방되어 있어 작업 시 채광과 통풍이잘 되며, 비가 오는 날에도 지붕 아래에서 작업을 이어갈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습니다. 이 구조는 일상적이면서도 매우 기능적인 형태로, 한정된 주거 공간 안에서의 생산성과 효율성을 극대화합니다. 일부 가정에서는 바레 다페르 공간을 확장하여 소규모 수공예 창고, 재료 보관소, 또는 지역 방문객을 위한 판매 공간으로 재구성하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여성들이 만든 짠 대나무 바구니, 의례용 꽃 장식, 손뜨개 소품, 직접 만든 향 주머니 등을 바레 다페르 한편에 진열하고, 마을 사람이나 외부 손님에게 판매하는 방식입니다. 이처럼 부엌을 중심으로 한 주거 구조는 생활을 넘어서, 곧바로 수입과 경제 자립의 기회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더 나아가 이 부엌 공간은 가족 내부에서의 지식 전승 장소로도 기능합니다. 어머니가 딸에게 요리법과 향 제조법, 제례용 음식의 제작 순서, 손기술을 세세하게 가르치는 장소이기도 하며, 이는 곧 지역 전통 문화의 지속 가능성과도 연결된 가치 있는 공간이 됩니다. 도시화가 진행되는 가운데에서도 발리 외곽의 여성들은 이 전통을 보존하며, 현대식 도구와 접목하여 시간과 비용을 절감하면서도 품질을 유지하는 방식으로 변화시키고 있습니다. 이러한 구조는 동남아시아의 많은 지역에서 남성 중심의 건축 흐름이 강한 것과는 다른 방향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발리의 경우, 주거 내 핵심 기능이 여성의 손에서 이루어지며, 공간 설계와 운영 또한 여성 중심으로 최적화되어 있습니다. 이는 단순히 전통을 유지하는 차원을 넘어, 공간이 개인의 역할과 경제적 위치를 규정하고 실현하는 도구로 작동하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합니다.

즉 발리 외곽 농촌의 부엌은 주방이라는 일상적 개념을 넘어서, 노동, 유통, 전통 보존, 가족 관계 형성까지 모두 포괄하는 복합적인 생활 시스템입니다. 이처럼 주거 공간이 경제 활동의 중심이 되는 구조는, 단순한 기능을 넘어 삶의 질과 문화의 지속 가능성에 직접적으로 기여하는 사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일상 동선의 대부분은 여성의 루틴에 맞추어집니다

발리 전통 주거 구조에서는 건물 배치와 통로, 출입 방향, 일조 시간 등 세부적인 건축 요소들도 여성의 활동 루틴을 반영하여 설계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를 들어, 해가 뜨는 방향인 동쪽에는 조상 제단과 사당을 배치하고, 여성들이 아침마다 의식을 준비하며 제물과 향을 바치는 데 필요한 동선을 자연스럽게 확보합니다.

또한, 물 사용과 빨래, 요리의 이동 경로가 짧고 효율적이게, 우물이나 수도가 대부분 부엌 가까이에 위치합니다. 이는 가사 노동을 수행하는 여성의 시간적 부담을 줄이는 데 초점을 맞춘 구조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한편, 가족 구성원 중 여성이 많을수록 별채 수나 작업 공간의 면적이 커지는 경향도 있으며, 이는 실제 현장 조사에서도 반복적으로 확인된 바 있습니다.

이처럼 전통 건축은 단지 '멋'이나 '관습'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생활의 실질적 효율을 공간 설계로 옮긴 형태라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세대를 넘는 여성의 주거 권리와 공간 상속

특이한 점은, 발리 농촌에서 주거 공간의 일부가 여성에게 상속되며, 실제 거주 우선권이 여성이 중심이 되는 경우가 많다는 점입니다. 이는 부동산 소유권과는 별도로, 생활권과 사용권의 관습적 할당 방식을 반영한 것이며, 여성 중심 가옥 구조가 단순히 현재의 배치만이 아닌 세대를 아우르는 공간 설계로서 작동한다는 뜻입니다. 예를 들어, 장녀가 결혼 후에도 부모 집에 남아 부모를 모시며 생활할 경우, 부엌이나 작업 공간은 그녀의 소유로 간주하며, 그녀의 딸이 다시 이 공간을 이어받는 식의 세대 간 공간 전승이 이루어집니다. 이러한 방식은 남성 중심 상속이 일반적인 아시아 문화권에서 매우 이례적이며, 여성의 주거 안정성과 경제적 기반을 보장하는 구조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에 따라, 발리 농촌에서는 ‘여성 없는 가옥은 비어 있는 공간’이라는 지역 관념이 강하게 존재하며, 여성이 거주하지 않는 가옥은 유지가 어려울 정도로 생활 기반이 약합니다. 이는 공간의 중심이 여성에게 있다는 강력한 문화적 상징으로 볼수 있습니다.

발리 외곽 농촌 지역의 여성 중심 가옥 배치와 주거 경제 구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