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남아시아 건축

태국 중부 평야 지역의 논 위 고상 가옥과 홍수 대응 전략

동남아시아 건축 알리미 2025. 5. 22. 15:06

동남아시아 건축은 지형, 강우, 농업 방식에 따라 다양한 형태로 진화해 왔다. 그중에서도 태국 중부 평야 지역은 메콩강과 짜오프라야강을 비롯한 수많은 하천이 흐르는 강우량이 풍부하고, 해마다 반복되는 침수 환경에 놓인 넓은 저지대 농업지대다. 이곳에서는 물과 땅이 뒤섞이는 계절을 견디기 위해, 오랜 세월 동안 ‘논 위 고상식 가옥(Raised Houses over Rice Fields)’이라는 독창적인 주거 형태가 발달해 왔다. 이 지역의 주민들은 논이 물에 잠기는 시기와 마른 시기를 정확히 예측해, 고상식으로 집을 짓고 지반에서 1.5~3미터 이상 띄운 구조를 기본으로 삼았다. 이러한 전통 가옥은 단지 침수를 피하기 위한 임시적 구조가 아니라, 농업과 기후, 생활이 긴밀하게 연결된 전통적 건축 지혜의 결정체다. 여기에서는 논 위 고상 가옥의 구조, 공간 운영 방식, 홍수 대응 기술, 공동체 생활 전략, 그리고 현대의 변화까지 입체적으로 살펴본다.

고상 가옥의 구조적 특징과 자연 적응

태국 중부의 전통 가옥은 대부분 목조 프레임 구조로, 기둥은 주로 티크 나무, 망고나무, 철목 나무 등 내구성이 강한 지역 목재로 세워진다. 이 기둥들은 물에 잠겨도 썩지 않도록 방부 처리되거나, 수백 년간 사용된 전통 구조물을 재활용하여 안정성을 높인다. 바닥은 일반적으로 1.5~3미터 높이에 설치되며, 홍수기에 논이 완전히 잠겨도 집 내부까지 물이 차오르지 않도록 설계된다. 지붕은 경사진 맞배지붕 또는 말발굽형 지붕으로 비를 빠르게 흘려보내며, 지붕 밑에는 공기 순환을 위한 개방형 창문이나 통풍 창살이 필수적으로 설치된다. 벽체는 대나무나 목재 판재로 구성되어 있으며, 필요시 쉽게 분리하거나 교체할 수 있도록 만들어져 있다. 특히 바닥은 틈이 벌어진 나무판으로 구성되어, 비나 흙탕물 유입 시 빠르게 배수되고, 습기가 머무르지 않도록 한다. 이러한 고상식 구조는 단지 침수를 피하는 목적 외에도, 모기·뱀 등 해충의 접근을 차단하고, 바람을 잘 통하게 하여 실내 온도를 낮추는 기능을 갖춘 매우 실용적인 건축 방식이다. 고상 아래의 공간은 농기구 보관, 가축 사육, 작업 공간, 임시 피난처 등 다용도로 활용되며, 침수기에는 배를 정박하거나 물고기잡이 도구를 두는 수상 공간으로 전환되기도 한다.

홍수 대응 전략으로서의 건축과 생활 운영

태국 중부 평야는 매년 6~10월 사이에 집중적으로 비가 내리며, 이에 따라 논과 주변 마을이 수일 또는 수주간 잠기는 것이 일상적인 기후 패턴이다. 고상 가옥은 이러한 수위 변화에 적응하기 위해 공간을 유동적으로 사용하는 방식을 채택한다. 대표적인 예가 이동형 가구 시스템과 탈부착형 바닥 판재다. 평소에는 거실이자 부엌이지만, 침수 시에는 가구를 상단 선반이나 천장에 매달아 수면 상승에 대응한다. 또한, 일부 가정에서는 바닥 판재 일부를 탈착식으로 만들어, 홍수 시 배수구 역할을 하도록 하거나, 비상시에는 물을 퍼내기 위한 하부 통로로도 활용한다. 물이 빠지는 시기에는 바닥을 드러내 햇볕에 말리는 작업도 가능하며, 이는 곰팡이와 해충을 예방하는 데 효과적이다. 특히 가옥 주변에는 작은 수상정(boat), 뗏목, 대나무 발판 등을 배치하여, 홍수기에 마을 간 이동과 물자 운반이 가능하도록 준비되어 있다. 주요한 지역 공동체에서는 고상 가옥끼리 좁은 간격으로 배치되어, 침수 시에는 집과 집을 연결하는 나무다리나 임시 통로를 만들고, 공동 부엌이나 구호품 보관소, 공동 보트 계류장 등을 함께 운영한다. 이는 단순한 건축을 넘어서, 기후 위기에 대응하는 공동체 기반 공간 운영 시스템이라고 할 수 있다.

논과 주거의 공존

논 위 고상 가옥의 가장 독특한 점은, 주거 공간이 곧 농업 공간과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는 점이다. 건물은 논 위에 지어지며, 집 앞과 뒤, 양옆이 모두 물과 논으로 둘러싸여 있어 거주자는 논의 수위와 상태를 실시간으로 체감하면서 살아가게 된다. 집에서 바로 벼의 상태를 관찰하고, 물고기 그물을 던지고, 배를 타고 논으로 나가 수확하는 일상이 반복된다. 특히 수확기에는 고상 아래의 공간을 이용해 수확한 벼를 건조하고 임시 보관하며, 침수가 잦은 해에는 지붕 위에까지 곡식을 올려두는 임시 창고 역할을 하기도 한다. 이처럼 가옥은 단순한 주거지를 넘어, 농업 생산, 저장, 가공까지 통합된 복합 공간으로 기능한다. 또한, 이러한 구조는 기후 변화와 농업 리스크에 대응하기 위한 전통적 방식이기도 하다. 건기에는 물이 빠진 논 위에서 채소를 재배하거나 가축을 방목하고, 우기에는 수상 작물(수련, 로터스, 물배추 등)을 기르며 수익을 다변화한다. 즉, 고상 가옥은 단순히 침수로부터의 보호를 넘어, 계절 농업 순환 시스템의 일부로 설계된 고도로 통합된 주거 구조다.

 

태국 중부 평야 지역의 논 위 고상 가옥과 홍수 대응 전략

현대화 속의 변화와 전통 건축의 계승

최근 태국 중부 평야 지역에도 콘크리트 주택, 단층 저소득 주거지 개발, 신도시 정비 사업 등이 확산하며 고상 가옥의 수가 줄어들고 있다. 특히 도로 인프라 정비와 전력·상하수도 시스템의 설치로 인해, 지면 위 콘크리트 구조물이 늘어나면서 수해 대응력은 오히려 약화하는 사례도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일부 지역에서는 고상 가옥을 현대화하여 내부는 철근 콘크리트, 외부는 목재 패널 구조를 결합하는 식의 전통-현대 혼합 주거 개발이 시도되고 있다. 또한, 기후 변화로 인한 비정형 홍수가 증가하면서, 전통 고상 가옥의 방수성과 구조 유연성이 다시 주목받고 있다. NGO와 건축 단체들은 전통 가옥 설계 원리를 현대 설계 기준에 맞춰 재해석하고 있으며, 일부 대학교 건축과에서는 ‘논 위 주거 구조의 현대적 전환’을 주제로 한 실험 프로젝트도 진행 중이다. 무엇보다도 태국 주민들 스스로가 이 전통 가옥을 단지 과거의 유산이 아닌, 미래 생존 전략의 일부로 인식하기 시작했다는 것은 매우 고무적이다. 아이들은 여전히 고상 아래에서 놀고, 어른들은 해마다 기둥을 보수하며 물의 흐름을 읽는다. 그 안에는 세대를 이어온 건축의 지혜와 자연과의 공존 방식이 살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