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남아시아 건축은 대체로 나무, 대나무, 흙 등 유기적인 재료를 중심으로 구성된 전통 목조건축이 주류를 이룬다. 하지만 인도네시아의 누사틍가라(Nusa Tenggara) 제도에서는 이와는 전혀 다른 경향의 건축 양식을 찾아볼 수 있다. 바로 돌기단(Punden Berundak)이라고 불리는 계단식 석조 기단 구조가 그것이다. 이 지역은 자바, 발리와는 다른 건축 전통을 지니며, 특히 고지대와 해안지역을 따라 분포한 마을에서는 돌을 주요 구조 재료로 활용하여 조상 숭배와 제례의 중심 공간을 구축해 왔다. 누사틍가라의 돌기단은 단순히 건물을 올리기 위한 기반 시설이 아니라, 정신적·사회적 중심지의 역할을 동시에 수행하는 복합적 공간이다. 기단 위에는 제단, 조상 위패 보관소, 마을 상징물 또는 작은 사원이 설치되며, 이는 마을 사람들에게 죽은 조상과 살아 있는 후손이 연결되는 장소이자, 자연과 신성한 질서가 교차하는 신령한 장소로 인식된다. 이러한 공간은 물리적인 건축 그 자체를 넘어, 사람들의 정체성과 삶의 순환을 시각화한 상징적 건축물이라 할 수 있다. 돌기단은 특히 공동체의 역사와 위계, 영적 권위를 공간적으로 표현하는 수단으로도 사용된다. 큰 마을일수록 높은 단 수의 기단을 갖고 있으며, 중심부 기단에는 족장이 직접 제례를 주관하거나, 외부 사절을 접견하는 등의 사회적 위계와 의례의 격식이 실현되는 공간으로 활용되기도 한다. 즉, 누사틍가라의 돌기단은 단순한 ‘돌 쌓기’가 아닌, 건축을 통한 세계관의 구현이다.
돌기단 건축의 재료와 축조 기술
누사틍가라 주민들은 대부분 화산지형에 기반한 산지 환경에서 살아가며, 그 지형에서 직접 얻을 수 있는 검은 현무암, 붉은 사암, 석회암 등을 건축 재료로 활용해 왔다. 이 돌들은 현대적 기계 없이도 채취 가능한 중간 크기의 석재로, 주로 망치와 쐐기, 끌을 이용해 거칠게 가공된다. 그 후, 크기와 모양을 맞추지 않고 중량감과 마찰력만으로 안정성을 확보하는 전통 석조 기술로 기단이 축조된다. 이러한 방식은 기계화되지 않은 수작업의 축적된 노하우와 집단 노동의 결과물이다. 기단은 보통 3~5단 정도로 구성되며, 단마다 넓이와 높이가 달라진다. 기단 하층은 넓고 완만하여 대중이 모일 수 있는 공간, 중층은 특정 인물이나 무당, 족장 등 일부 구성원만 올라갈 수 있는 공간, 최상층은 신과 조상에게만 허락된 신성 공간으로 여겨진다. 이는 공간의 물리적 단차를 통해 상징적 위계를 표현하는 방식이며, 의례의 동선과 권한의 구분을 건축적으로 명확히 드러낸다. 돌기단 벽면에는 배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홈통이나 돌 간 틈새를 이용한 배수로가 설계되어 있어, 우기에도 기단이 무너지지 않도록 했다. 기단의 바닥에는 대형 평판 석재를 깔아 제단 설치나 춤, 제례 도구 배치가 가능하게 한 실용적 설계도 적용되어 있다. 이러한 기술은 단순한 돌 쌓기를 넘어, 건축과 환경의 조화를 추구한 지역적 지혜의 집약체다.
돌기단과 조상 숭배 의례 공간
돌기단 꼭대기에는 대개 ‘멜루아(Melua)’ 또는 ‘메소롯(Mesorot)’이라 불리는 제단이 설치되어 있으며, 이곳은 마을 제례의 핵심 무대로 기능한다. 마을 주민들은 연 1~2회 열리는 조상 제례 또는 풍년 기원 의식 때 이곳에 모여 음식과 동물 제물, 수공예품, 향 등을 바치며 조상의 영혼을 초대한다. 제례는 단순한 추모가 아니라, 자연의 힘과 조상의 보호를 삶에 끌어오는 의례 행위로 여겨진다.
특히, 전통 무용과 악기 연주, 노래 낭송 등이 제단 앞에서 이루어지며, 마을 여성들이 만든 옷감이나 바구니, 장식물 등이 조상에게 바쳐진다. 이때 돌기단은 단순한 제물 배치 장소를 넘어, 마을 공동체의 정체성과 예술, 종교, 정치가 교차하는 상징적 무대가 된다. 이 공간에서 사람들은 조상과의 연결뿐만 아니라, 현재 살아 있는 공동체로서의 일체감을 새롭게 확인한다.또한, 일부 돌기단 하층 또는 옆면에는 조상 위패나 유물, 정령석이 보관된 작은 석실이 마련되어 있다. 이 공간은 평소에는 닫혀 있으며, 제례일에만 열려 기억의 재개방이 이루어진다. 이러한 석실은 돌기단을 단순한 상징물이 아닌 ‘기억을 담는 건축적 그릇’으로 기능하게 만든다. 즉, 이 구조물은 현재를 살고 있는 사람들의 건축물이자 동시에 죽은 자를 위한 영혼의 집이다.
공동체 조직과 돌기단의 사회적 의미
누사틍가라의 돌기단 건축은 그 물리적 구조만큼이나 사회 조직적 의미가 깊다. 기단을 쌓는 과정은 단순히 ‘건설’이 아니라 공동체 의식의 형성 과정이기도 하다. ‘동망 동란’이라 불리는 공동 노동 제도는, 돌기단 건축 시 모든 가구가 힘을 합쳐 돌을 운반하고, 정리하고, 의식을 준비하는 협력 구조를 형성한다. 이는 단순한 작업 협력이 아니라 공동체 구성원 모두가 조상의 공간 건축에 직접 참여한다는 의무이자 권리로 받아들여진다. 건축 이후에도 돌기단은 단순히 의례용 건물이 아니라, 중요한 사회적 결정을 내리는 장소로도 사용된다. 예컨대 족장 선출, 분쟁 조정, 마을 이주 결정, 외부 인사 환영 등은 모두 돌기단 앞에서 이루어진다. 이는 공간 그 자체가 권위를 부여하고, 정치적 상징성을 지니는 구조물로 기능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마을 청년들에게는 돌기단 건축이나 유지보수에 참여하는 경험 자체가 성인식 또는 사회 교육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이를 통해 다음 세대는 기술뿐 아니라 건축에 담긴 상징과 공동체 윤리를 자연스럽게 계승하게 된다. 즉, 돌기단은 집단의 기억과 질서를 물리적으로 구조화한 건축 시스템이라 할 수 있다.
현대화 속 돌기단 건축 보존과 재해석
현대에 들어서면서 누사틍가라의 돌기단은 문화유산이자 관광 자원으로 새롭게 조명되고 있다. 일부 마을은 돌기단 주변에 소규모 박물관이나 전통 의례 해설 센터를 마련하고, 전통 축제 기간에는 방문객을 대상으로 의례 재현, 공예 체험, 전통 음악 공연을 제공한다. 이러한 프로그램은 마을 경제에 도움을 주는 동시에, 자기 문화에 대한 자긍심을 키우는 도구가 된다. 한편, 건축 전문가들과 NGO는 돌기단 보존을 위한 기술적 지원과 교육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기존 기단의 균열을 복원하거나, 배수로를 개선하고, 돌의 마모 상태를 측정하여 구조 안정성을 높이는 현대 기술이 투입되기도 한다. 이와 함께 청년층을 대상으로 전통 돌기단 기술 전수 워크숍을 열어, 문화와 기술이 함께 계승될 수 있도록 돕고 있다. 더 나아가 인도네시아 국내 건축가들은 돌기단 제단 구조에서 영감을 받아, 현대 공공 공간, 박람회장, 도서관, 공원 설계 등에 응용하고 있다. 특히 ‘계단형 단차 공간’, ‘제례 광장과 연결된 앉는 구조’, ‘돌과 자연의 어우러짐’이라는 개념은 사회적 공간 디자인의 새로운 모티프로 발전하고 있다. 즉, 누사틍가라의 돌기단은 고립된 전통 유산이 아니라, 현대 공간에 전이 가능한 살아 있는 건축 언어로 재해석되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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