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남아시아 건축이라고 하면 대개 대나무 가옥, 수상 주택, 열대 기후에 맞춘 고상식 집들을 떠올리게 됩니다. 그러나 미얀마 서부에 위치한 친주(Chin State)에서는 전혀 다른 건축 전통이 형성되어 왔습니다. 이곳은 해발 1,000~3,000미터의 고산지대가 이어지는 지역으로, 인접한 인도 북동부와 방글라데시 접경 지역까지 걸쳐진 오지입니다. 친주 지역의 주거는 대부분 언덕과 산비탈 위에 지어진 경사형 목조 가옥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지형, 기후, 외부와의 단절성 때문에 극도로 독립적인 공간 구조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이 건축은 단순히 '산에 있는 집'이 아니라, 극한의 자연조건 속에서 생존을 가능케 한 공간 기술의 집합체입니다. 특히 친족 중심 공동체 구조, 높은 강수량, 경사면 토양, 외부 접근성의 어려움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이 지역만의 독특한 생존형 건축 양식을 만들어냈습니다.
경사면 위의 집
친주의 전통 가옥은 완전히 평평한 부지를 찾기 어려운 언덕 지형에 최적화되어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경사 15~30도에 이르는 비탈에 건물을 짓기 위해 지형을 깎거나 평탄화하지 않고, 기둥의 길이를 조절하여 자연 경사에 맞춰 건물을 띄우는 방식이 주로 사용됩니다. 이러한 구조에서는 건물의 한쪽 기둥이 다른 쪽보다 2~3배 길며, 그 아래는 가축우리, 연료 보관소, 작업 공간 등으로 적극 활용됩니다. 바닥은 주로 단단한 목재판으로 이루어지며, 수직 하중을 분산시키기 위해 기둥 간격을 불규칙하게 설계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이러한 설계는 지진이나 산사태 위험이 있는 지역에서도 구조적 유연성을 확보할 수 있는 방식입니다. 또한, 경사형 가옥의 특징으로는 집 내부에서도 바닥이 약간 기울어 있는 경우가 많다는 점입니다. 이는 고의적인 설계로, 빗물이나 음식물 등이 한쪽으로 자연스럽게 흘러나가도록 하는 배수 시스템의 일환입니다. 경사가 삶의 불편이 아닌 생존을 위한 지혜로 전환된 사례입니다.
재료는 모두 숲에서
친주의 주거 건축에서 사용되는 재료는 대부분 자급자족적인 삼림 자원에서 조달됩니다. 특히 이 지역은 미얀마 전체에서도 손꼽히는 활엽수림과 침엽수 혼합 지대로, 단단하면서도 무게가 가벼운 나무들을 쉽게 구할 수 있습니다. 가장 흔히 쓰이는 재료는 차파크(Chepak), 탄나(Tanna), 로지아(Logia) 등의 지역 수종으로, 내습성과 벌레에 강한 특성을 가집니다. 지붕은 대개 단면이 낮은 경사형으로 설계되며, 판잎(leaf mat), 얇은 목판, 또는 최근에는 얇은 철판으로 덮기도 합니다. 이 지붕은 강풍을 피해 낮은 높이로 설치되며, 반대편은 완전히 닫혀 있고, 바람이 불어오는 방향에는 반개방형 벽체를 둬서 환기를 조절하는 구조입니다. 겨울철에는 벽면을 보온재로 임시 보강하는데, 이마저도 주로 짚, 소가죽, 마른 나무껍질로 처리합니다. 창문과 문은 작고 적으며, 대부분 환기와 빛보다는 방한을 고려한 구조입니다. 외부와 차단된 구조 덕분에, 친주 가옥은 여름에는 더위를 막고, 겨울에는 내부 온기를 유지하는 수동적 기후 조절 시스템을 갖추고 있습니다.
한 집 안의 모든 기능
친주의 전통 목조 가옥은 1세대 또는 2세대의 핵가족이 함께 생활하는 독립 단위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 가옥들은 보통 하나의 직사각형 형태 안에 거주, 조리, 저장, 난방, 생업 활동을 모두 포함하고 있으며, 별도의 건물 없이 한 채의 집 안에서 자급자족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습니다. 공간의 효율성은 고립된 지형 조건에서 살아남기 위한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입니다. 가옥 내부는 평균적으로 2개에서 3개의 방으로 구분되어 있으며, 그 중 가장 큰 방은 다양한 기능을 수행하는 ‘다목적 공간’으로 사용됩니다. 이 다목적 공간에는 중앙 화덕(fire hearth)이 설치되어 있어, 한겨울에 난방을 담당하는 동시에, 식사를 준비하고 음식을 가열하며, 생업 활동을 위한 열원 역할도 수행합니다. 낮에는 이 공간이 가족의 거실, 작업 공간, 손님 접대 장소로 사용되고, 밤이 되면 침구를 꺼내어 잠자리로 전환됩니다. 이렇게 하나의 공간이 시간에 따라 다양한 목적을 수행하는 구조는, 공간의 유연성과 적응력에 중점을 둔 고산지대 생존 전략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화덕 위쪽 천장에는 작은 나무 선반과 대나무 구조물이 고정되어 있는데, 이곳은 식재료와 생활 용품을 보관하는 주요 공간입니다. 말린 옥수수, 말린 고기, 약초 다발, 나무 숟가락, 짚 바구니, 수공예 재료 등이 천장 가까이 매달려 있고, 이는 자연스럽게 화덕의 열기와 연기를 활용하여 방부 효과와 해충 방지를 동시에 달성하게 됩니다. 친주의 고산기후는 겨울에 특히 춥고 습한데, 이러한 방식은 전통적으로 저장성과 위생을 동시에 만족시키는 가장 실용적인 방법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출입문은 대부분 정면에 단 하나만 설치되어 있으며, 작은 출입문은 외부와의 접촉을 최소화하고, 내부의 온기를 유지하며, 야생 동물의 침입을 방지하기 위한 목적으로 설계됩니다. 창문 역시 크기가 작거나 아예 없으며, 환기나 채광보다는 에너지 보존과 보안성을 우선으로 고려한 구조입니다. 창문이 없는 구조가 비효율적으로 느껴질 수 있지만, 실제로는 벽을 보온 단열재처럼 활용하여 기후 환경에 최적화된 설계를 실현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단일 통합형 구조는 친주 고산지대의 지형적 고립성과 낮은 외부 접근성과도 밀접한 연관이 있습니다. 친주의 마을은 대개 10 가구에서 많아야 50 가구 정도로 구성된 소규모 집단이며, 마을 간 거리도 멀고, 가구 간 거리도 꽤 떨어져 있습니다. 이러한 구조 속에서 각 집은 외부 지원 없이도 장기간 생존이 가능해야 하기 때문에, 집 안에서 모든 기능이 해결될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습니다. 예를 들어, 가축을 기르는 공간은 집 하부에, 물을 저장하는 항아리는 외벽 가까이에, 불씨를 보관하는 돌구덩이는 바닥 모서리에 위치하는 등, 집의 내부와 외부 공간이 기능적으로 매우 치밀하게 연계되어 있습니다. 심지어 집 안에는 간단한 의료 행위를 위한 공간도 마련되어 있습니다. 기초적인 민간요법을 활용할 수 있는 공간에는 약초 말리는 바구니, 수제 약봉지, 응급용 의자 등이 구비되어 있으며, 이는 외부 병원 접근이 힘든 환경에서 가족 내 건강을 자급자족 형태로 관리하는 고유한 생활 구조로 이어집니다. 결국 친주의 목조 가옥은 단순한 '주거지'가 아니라, 하나의 독립된 생존 단위, 자립적인 생태 공간, 그리고 지역 공동체의 기본 단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안에는 인간이 자연에 순응하며 살아가는 방법, 세대 간 지식을 계승하는 통로, 그리고 외부와 연결되지 않아도 기능할 수 있는 구조적 지혜가 녹아 있습니다.
전통과 변화의 갈림길
최근 몇 년 사이, 친주 지역에도 외부 NGO, 정부의 인프라 사업, 보건 프로젝트 등이 진행되면서 일부 마을에는 철제 지붕, 콘크리트 기초, 태양광 패널이 도입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변화는 늘 긍정적이지만은 않습니다. 경사 지형에 적합하지 않은 재료와 구조는 오히려 배수, 통풍, 구조 불안정 등의 문제를 유발하기도 합니다. 또한, 외부에서 제공된 설계도는 전통적인 생활 패턴과 맞지 않아 오히려 불편함을 초래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예를 들어, ‘방’의 개념이 세분된 현대식 구조는 다목적 공간에 익숙한 친주 주민들에게는 동선상의 불편함이 됩니다. 그러나 긍정적인 흐름도 있습니다. 일부 청년층은 전통 목조 기술을 보존하면서, 현대 기술을 최소한 접목하는 하이브리드 가옥을 짓고 있으며, 학교 건물, 보건소, 공동 창고 등은 전통 건축 기법을 참고한 친환경 구조로 설계되고 있습니다. 이처럼 친주의 언덕 위 목조 가옥은 여전히 생존 중심의 건축으로 살아 있으며, 고립이 아닌 자립의 구조로 발전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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