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남아시아 건축

자바섬의 다층 주거와 가족 공동생활

동남아시아 건축 알리미 2025. 5. 25. 12:45

인도네시아 자바섬의 전통 주거는 단순한 거처가 아니라 가족 공동체의 축소판입니다. 현지에서는 할아버지·할머니부터 아들 부부, 손주 세대까지 최소 3세대가 함께 한 집에서 생활하는 구조가 일반적이며, 그에 따라 공간 설계 또한 다세대 동거를 전제로 발전해 왔습니다. 이러한 공동 거주는 가족의 유대를 강화하는 동시에, 일상생활과 생계유지, 의례와 돌봄까지 공간 안에서 해결할 수 있는 전통적인 사회 시스템으로 작용합니다. 자바섬의 전통 가옥은 루마 아딧(Rumah Adat)이라고 불리며, 지역별로 건축 방식에 차이가 있지만 공통적으로는 공유 공간을 중심으로 각 세대의 방이 배치되는 수평 확장형 구조를 갖추고 있습니다. 현대식 아파트나 주택에서처럼 각 세대가 완전히 분리된 것이 아니라, 문턱 하나, 벽 하나 사이를 사이에 두고 밀접하게 생활합니다. 이는 물리적 거리보다 정서적 친밀감을 중요시하는 자바 전통의 가족관이 건축에 고스란히 반영된 사례입니다.

수직보다 수평이 우선

자바섬의 주거는 ‘다층’이라는 말이 반드시 2층, 3층의 수직적 구조를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대부분의 전통 가옥은 수직 확장이 아니라 수평 확장을 통해 다세대 거주 공간을 마련합니다. 즉, 기존 집 옆에 작은 별채를 붙이거나, 마당의 한쪽에 새로운 방을 지어 추가 세대를 수용하는 식입니다. 이러한 확장은 일반적으로 가장 어린 세대가 결혼하거나, 부모 세대가 자녀 돌봄을 도울 필요가 있을 때 이루어지며, 기초는 동일한 지붕 아래에 있지만 각 방은 출입문이 독립적이거나, 부분적으로 연결된 회랑을 통해 소통할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습니다. 기후 조건 역시 이러한 수평 확장을 지지합니다. 자바는 연중 평균 기온이 28도 이상이며, 습도도 매우 높기 때문에 공기 흐름을 막지 않는 구조가 중요합니다. 지붕은 넓게 퍼진 박공지붕 형태로, 내부 공간은 천장이 높고 통풍이 잘되도록 설계되어 있어 방마다 창을 두기보다 공용 회랑과 마당을 통해 자연환기가 이루어지는 구조를 갖추고 있습니다.

공용 공간의 역할과 배치

자바의 전통 가옥은 공간별 기능이 명확하게 구분되면서도 유연하게 운영됩니다. 가장 중심이 되는 공간은 펜도포(pendopo)라고 불리는 개방형 거실 겸 회의 공간입니다. 이곳은 가족들이 모여 식사를 하거나 이야기를 나누는 공간으로, 기둥과 지붕만 존재하고 벽이 없는 구조를 갖추고 있습니다. 종교 의식, 제사, 손님맞이 등 공적인 행위의 대부분이 이곳에서 이루어지며, 때로는 동네 주민들이 모이는 회의장소로도 사용됩니다. 펜도포 주변에는 주방, 안방, 창고, 마루, 어린이 방 등이 순서대로 배치되며, 공간 간 경계는 문이나 벽이 아닌 바닥 높이, 처마의 구분, 기둥 간 간격 등으로 설정됩니다. 이는 가족 간 사적인 영역을 침해하지 않으면서도 서로의 존재를 인식할 수 있는 공간 설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부엌은 전통적으로 여성의 작업 공간이지만, 단순한 요리를 넘어서 가족 경제의 핵심 거점으로 기능합니다. 예를 들어, 여성들이 시장에 내다 팔 간단한 떡, 튀김, 향신료, 포장 재료를 부엌에서 생산하기도 하며, 그 수익은 집안 생활비나 공동 경조사 비용으로 통합 관리됩니다. 욕실과 빨래터는 보통 마당 가장자리에 설치되어 있으며, 온 가족이 함께 사용하는 구조입니다. 대신 시간대를 나누거나 사용 순서를 정하는 비공식적인 룰이 정해져 있고, 가족 구성원이 많을 경우 남성용·여성용 공간을 따로 나누기도 합니다.

세대 간 역할 분담

공간이 공유되는 만큼, 자바섬의 가족 구성원들도 생활 속에서 자연스럽게 역할을 분담합니다. 노년층은 가정 내 권위자로서 종교 행사와 전통 관습의 유지, 중년층은 경제 활동과 자녀 양육의 책임, 청년층은 디지털 기기 사용이나 외부 정보의 유입, 손님 응대 등의 실무적 역할을 맡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러한 구조는 공간만 아니라 시간과 행위 자체를 공동체적으로 조직하는 방식이며, 단순한 주거를 넘어서 가족 운영 시스템이자 생존 전략으로 작용합니다. 예를 들어, 주방에서 조리 할 때 한 세대가 식사만 준비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세대가 함께 먹을 음식을 계획하고 분담하여 조리하는 협업 방식이 일반적입니다. 또한 집안의 중심 어른이 사망하거나 이주하게 되면, 그 역할과 방의 우선 사용권은 자연스럽게 나이순 혹은 가족 내 지위에 따라 재조정됩니다. 이처럼 유동적인 구조는 한정된 공간을 장기적으로 유지할 수 있는 공동체 거주지로 발전시키는 핵심 원리입니다.

 

자바섬의 다층 주거와 가족 공동생활

전통 속에서 이어지는 건축 규칙

자바섬에서는 건축 자체도 하나의 관습 체계로 간주합니다. 예를 들어, 집을 지을 때는 가족의 연령대, 자녀 수, 조상의 위치, 조화로운 배치를 모두 고려하며, 건축 시 방향과 입구의 위치, 기둥 수, 처마 길이까지도 전통 신앙이나 이슬람 관습에 따라 설계됩니다. 또한 새로 공간을 추가할 때는 마을 장로나 종교 지도자에게 먼저 상의하며, 공간이 지나치게 폐쇄되거나 외부와 단절된 느낌이 들지 않도록 항상 개방성과 연계성을 중시합니다. 이러한 태도는 오늘날에도 소규모 단지 개발이나 개보수 프로젝트에서 유지되고 있으며, 자바 전통 건축이 단절되지 않고 계승되고 있는 중요한 이유 중 하나입니다. 건축 자재는 주로 대나무, 티크나무, 점토 벽돌, 야자잎 등이 사용되며, 최근에는 이를 현대 재료와 결합해 철근 콘크리트 기반에 전통 지붕이나 외장재를 얹는 하이브리드 구조가 증가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방식은 자바 전통의 형태는 유지하면서도 내구성과 기능성을 보완하는 현실적인 절충안으로 주목받고 있습니다.

지금도 살아 있는 집의 문화

자바섬의 다세대 주거는 도시화와 아파트 보급, 소형 핵가족 증가로 점차 줄어들고 있지만, 농촌 지역이나 전통 마을에서는 여전히 그 형태와 기능이 살아 있는 문화유산처럼 이어지고 있습니다. 현대 도시계획에서 자바식 주거 구조는 공동체 중심 설계, 다기능 공간 구성, 유연한 구조 조정이라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모델로 연구되고 있으며, 몇몇 건축가들은 이를 바탕으로 현대형 펜도포 설계열린 회랑 구조 아파트 등을 시도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흐름은 단지 전통을 보존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과 사람의 연결, 공간의 지속 가능성, 가족 중심 문화를 재발견하고 현대에 적용하는 시도입니다.